대구의 첫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濟衆院)의 설립은 개신교(장로교)의 전파와 맥을 같이한다. 비록 규모도 작고 의료기기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데다 의사도 단 한 명뿐이었지만 당시 열악했던 의료 환경 속에서 엄청난 파급 효과를 보였다. 1899년 12월 개원 후 1년도 채 안 된 이듬해 여름까지 1천700여 명을 진료했고 50차례 수술이 이뤄졌다.
◆대구, 선교지회로 승인받다
1891년부터 부산'경남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펴던 윌리엄 베어드 목사는 1893년과 1894년 두 차례 대구경북을 둘러봤다. 전도 여행을 통해 대구가 경북의 선교기지로 최적합지라고 판단한 베어드 목사는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 '대구 스테이션', 즉 대구 선교지부 설치를 청원했다.
6가지 근거를 내세웠는데 대구가 정치적, 지리적 중심지이자 교통요지라는 이유와 함께 약령시가 열린다는 이유도 포함했다. 베어드 목사가 처음 대구를 찾았던 1983년 4월 22~25일은 때마침 약령시가 열리던 기간이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대는 약재시장을 보며 의료에 대한 조선인의 열의에 꽤 놀랐던 모양이다.
베어드 목사의 청원이 받아들여진 것은 1895년 11월이었다. 하지만 독립적인 대구 선교지부가 아니라 부산지부의 감독을 받는 내륙지회로 승인이 났다. 내륙지회는 너무 위험하다는 주한 미국공사 알렌의 반대에도베어드 목사는 한달음에 부산에서 대구로 달려왔다. 행여 소문이 날까 봐 한복을 입고는 선교지회에 적합한 집을 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듬해 1월 베어드 목사는 남문 안에 땅 420평과 초가집 5동, 기와집 1동을 사들였다. 당시로는 대저택인 셈이다.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 그해 4월 부산에 있던 아내와 세 살 난 아들을 데리고 대구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평생 대구에서 살겠다고 다짐했던 베어드 목사의 결심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해 서울지역 교육담당 고문으로 발령났기 때문이다. 결국 대구에 개신교가 뿌리내리고, 근대의료가 자리 잡는 터전을 만들어 놓고 베어드 목사는 1896년 12월 이삿짐을 챙겨 서울로 떠났다.
대구의 선교 업무는 손아래 처남인 제임스 아담스 목사에게 넘겨졌다. 아담스 목사는 현 대구제일교회의 전신인 '남문안 예배당'(야소교회당)을 세웠고,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경북 일대를 돌며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대구의 두 번째 선교사는 의사였다
아담스 목사에 이어 두 번째로 부임한 선교사는 신학을 전공한 목사가 아니라 의학을 공부한 우드브릿지 존슨이었다. 존슨이 없었다면 서양 의료의 도입은 더 늦어졌을 것이다.
존슨은 1869년 6월 9일 미국 일리노이주 게일스버그에서 태어났다. 1891년 6월 펜실베이니아주 라파옛 대학을 졸업한 뒤 1895년 6월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이미 대학 시절 설교자인 드와이트 무디(1837~1899)에게 감명받아 장차 의료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킹스카운티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더 많은 치료 경험을 쌓기 위해 윌키스 바레 시립병원에서 다시 인턴과정을 밟았다. 부인이 될 에디스 파커는 뉴욕 슬로운 모자병원에서 선교에 도움이 되기 위해 조산학 단기과정을 마쳤다. 파커는 소독법, 산과학, 신생아와 모자 간호법 등을 배웠다.
이들은 1897년 6월 21일 선교사로 임명됐고, 10월 28일 결혼했다. 곧장 해외 선교지로 떠나고 싶었지만 선교부의 예산 부족으로 본인들이 선교비를 마련해야만 출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2주 만에 교회 측에서 선교비 전액을 부담해준 덕분에 조선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결혼한 지 20일 만인 11월 18일 그들은 태평양을 건너 조선으로 향했다.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한 달여 뒤인 12월 22일. 하지만 여독을 풀 틈도 없이 이들은 곧바로 대구로 출발했다. 대구에 있는 아담스 부인의 출산이 임박했으니 곧장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다. 존슨은 1897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조랑말을 타고, 부인 에디스 파커는 장정 네 명이 메는 가마를 타고 짐꾼들과 함께 드디어 대구 남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서양의료 첫발을 내딛다
대구에 첫 서양식 의료기관이 문을 연 것은 1899년 12월 24일로 추정된다. 날짜를 확정하지 못하고 '추정'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당시의 기록 때문이다. '미국장로교 한국선교사' 기록에 '진료소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개원했다'고 나와 있고, 진료소를 연 주인공인 존슨의 보고서에도 '크리스마스 무렵까지 공식적으로 개원하지는 않았지만 대구의 의료사업은 고무적'이라고 적고 있다. 이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바로 앞둔 시점에 진료소가 문을 연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존슨의 대구 도착과 진료소 개원 사이에 2년간의 공백이 있다. 그동안 존슨은 무엇을 했던 것일까? 미국을 떠나기 전 존슨은 아담스 목사의 편지를 받았다. '의사인 줄 알면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고, 그러면 공부할 시간이 없을 터이니 당분간 어학 공부에 전념하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존슨은 팔공산 파계사에 들어가 몇 달간 지내며 하루 평균 5시간씩 우리말을 공부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병원을 열 수 있는 의료도구와 약품 등이 도착하지 않았다. 이들 물품은 존슨이 입국한 지 1년 반 정도 지난 1899년 7월에야 대구에 들어왔다. 당시 물품은 낙동강을 오가는 배를 통해 도착했던 것 같다.
존슨이 문을 연 진료소는 지금과 비교하면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진찰실은 4.2㎡(1.26평)에 불과했고, 그나마 약제실과 수술실이 자리 잡은 큰 방도 33.5㎡(10평) 정도였다. 진료소와 별도로 대기실이 있었는데 15명 정도가 들어가면 꽉 차는 방이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추위와 더위,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진료소 주변에는 철사로 울타리를 치고 빗장 달린 대문도 세웠다. 성급히 진료받고 싶거나 호기심에 치료 과정을 보고픈 사람들이 밀려들까 봐 염려해서다.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하기 전에 존슨은 단순히 약품만 팔며 '미국약방'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치료를 시작하면서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미국 장로회 선교부가 세운 병원은 서울, 평양 등 어느 곳에나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썼다. 올해로 개원 114년을 맞는 동산의료원은 이처럼 작디작은 대구읍성 남문안 진료소에서 시작됐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 = 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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