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재회(再會)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 즈음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넓은 들녘을 바라보다가 발길이 닿은 곳은 향토특산품 코너였다. 각종 장아찌와 효소 등 풍성한 먹거리가 사람들을 붙잡아두었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등겨장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리운 이와 재회라도 한 듯 다른 것엔 눈길도 돌리지 않고 얼싸안고 나왔다.

'딩기장' 또는 '시금장'이라 불렀던 등겨장은 조상의 지혜가 담긴 경북지역의 식품이다. 이름도 생소하고 시중에서 판매되지 않는 식품이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내겐 아련한 추억의 음식이지만 오래전 어른들에겐 가난한 시절, 보리 속겨를 구워서 만든 반찬대용의 발효 식품이다.

어릴 적 외가에 가면 오종종히 차려진 밥상에는 늘 등겨장이 빠지질 않았다. 반찬이라야 김치에다 짭조름한 생선 한 토막이 전부인 소박한 시골 밥상이었다. 입에 맞지도 않은 등겨장과 마주하였으니 싫은 내색 못하고 억지로 먹곤 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렇게 싫어했던 그 음식이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부터 자꾸만 생각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간절한 생각은 옛 기억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등겨장은 손이 많이 가는 식품인데다 만드는 과정조차 어려워 아무 곳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생활이 나아지면서 보리농사가 줄어들고 자연적으로 귀한 음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이산가족 상봉하듯 만나게 되었으니 부리나케 사 버린 것이다. 삼십 년의 세월을 훌쩍 넘기고서야 느낀 그 맛은 예전 그대로였다. 어렵사리 사온 것을 아껴서 먹고 있던 중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색깔은 거무스름한데다 시큼한 냄새까지 났으니 음식이 상했다고 생각한 아이가 모두 버린 것이다. 하기야 지금의 아이들 입과 눈에는 처음 보는 것이니 그저 상한 음식으로 비쳤을 것이다. 무슨 화려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과 입을 쉽게 끌어당기는 인스턴트식품에 비하면 그야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버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고향 선배인 P선생님께서 등겨장 얘기를 꺼내셨다. 그도 역시 그리운 맛을 잊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명절 밑이라 선물 치레로 주문해 드렸더니 숙성도 되기 전에 다 드셨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옛것이 그리워진다. 그것은 곧 추억을 더듬는 것이리라. 보기 좋고 아름다운 것만이 그리운 것은 아니다. 투정했던 그 음식이 그리워지고 정이 가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음이 아닐까.

- 아, 나의 할머니! 거친 등겨장처럼 곰삭은 당신의 사랑이 그립습니다. -

윤경희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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