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은 즐겨 꽃을 노래해 왔다. 청순한 정절을 상징하며 세한삼우(歲寒三友)에 드는 매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파를 이겨낸 은은한 향기와 함께 이른 봄 피는 특징 때문에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듯이 많은 이가 매화를 예찬했다.
이번 글은 바람에 꽃잎을 떨며 희망의 향기를 전하는 봄의 전령사 매화가 피기 시작한 때에 맞추어 퇴계(退溪)의 시 한 수를 읽어보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퇴계의 매화와 관련된 일화들부터 보면, 임종하는 아침까지도 그는 매분(梅盆)에 물을 주라는 말을 잊지 않았고, 또한 병상의 불결한 설사가 미안하다고 방에서 꽃을 옮기도록 일렀다. 한편 후세에 로맨스를 상상하게 만든 한 일화에서는 한 해도 채우지 못하고 떠났던 단양 군수 시절 그는 관기 두향(杜香)과 함께했던 인연을 끝내야 했다. 떠나는 그에게 두향은 이별의 선물로 매화 화분을 선물했고 이후 퇴계가 죽자 그녀는 강물에 투신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들이 그의 매화시를 읽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요즘처럼 가끔씩 약간 찬 느낌이 든 달밤이었을까. 춘정(春情)에 젖은 그는 다음 시에서 매화의 성근 그늘 밑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뜰 가운데 거니는데 달이 사람을 쫓아오네.
매화 언저리 돌며 걷노니, 몇 번이나 돌았을까?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남조차 모른 채 잊었네.
옷깃 흠뻑 꽃향기 배고, 달그림자 몸 가득히 묻었어라.
마지막 행의 극적인 묘사는 매화를 여인으로 바꾸면 흡사 어두침침한 달밤에 여인과 밀애 중인 황홀한 정경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옷깃 흠뻑 꽃향기 배고"라는 구절은 헤어지기 아쉬운 연인끼리 짙은 포옹 끝에 여인의 향기가 가득 남겨진 옷섶을 떠올리게 만든다.
요사이 꽃가지를 시샘하듯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갈수록 가깝고 먼 인간관계들이 이해로 복잡하게 얽혀 상황 판단이 힘들어지는 것 같다. 그럴수록 생명력과 함께 인내와 용기를 북돋아 줄 매화향이 복음(福音)처럼 그리워진다. 그러나 곧 봄꽃들이 초대할 꽃잔치에 우리는 어떤 시인의 아름다운 말보다 고운 꽃잎의 미소에 웃음으로 답하며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한때 내게 꿈과 희망을 뜻했던 매화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 이런 많은 바람들을 담아 여성적인 느낌의 매화를 상상하며 퇴계의 '도산(陶山)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의 한 수를 읽어보았다.
장두현<시인·문학박사 oksanj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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