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부옇게 보였습니다. 둥글지만 한쪽 구석이 약간 옴폭한 보름달이었습니다. 음력과 실제 달의 주기가 살짝 어긋나버린 달. 진짜 보름달은 바로 다음날 밤에 볼 수 있었습니다.
'하얀 얼굴이 언제나 웃는 듯한 보름달.'
나도향은 보름달을 '영화와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라고 했습니다. 달 속에 옥토끼와 계수나무가 살고 있다고 상상하던 시절이었지요. 달에 대한 인간의 감상은 달 탐사 이후 다른 국면을 맞는 듯했습니다. 한 시인은 아폴로 이후 자신은 문학에서 커다란 자산을 잃어버렸다고 한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분화구를 생각한다던가 생명체가 자라지 않는 차가운 암석을 떠올리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달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듯합니다. 대지를 밝히는 보름달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끼니까요. 소원을 말하고 싶다거나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기도 하지요. 그것이 달의 인력 때문일까요.
둥실 떠오른 달을 바라보던 남자의 마음도 들떠 두근거렸습니다. 비록 그것이 반달이었지만요. 이웃마을의 B가 술에 섞어 마시면 좋은 차를 소포로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B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향기로운 차에 넣은 술을 대접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그가 있는 마을과 B가 있는 마을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곳이었습니다. 두 마을 사이에는 덤불을 따라 모래톱으로 된 길이 있지만 밀물이 들어오게 되면 그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더구나 두 마을 사이의 바닷길은 해협을 이루어 바닷물이 밀려오면 순식간에 차오릅니다. 마을 사람들에겐 밀물 때가 되면 통행을 삼가는 것이 불문율이었지요. 그들에게 물때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B의 집에 도착한 시각은 한밤중이었습니다. 바다에는 달빛에 반짝이는 검은 갯벌이 끝없이 펼쳐 있었습니다. 반가움도 잠시, 그는 B의 아내로부터 집에 남아있는 술이 없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위험까지 감수하고 달려온 그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습니다. 좋은 차를 얻어 어서 집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이미 늦었지만 뛰어가면 만조가 되기 전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술이 몹시 급했거든요.
해변에 도착한 그는 멀리서 콸콸거리고 철썩이는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닷물이 그의 발등을 간질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래톱 길을 따라 뛰었습니다. 바닷물은 발목을 적시고 얼마 후 무릎까지 차올랐습니다. 어느새 길을 알려주는 덤불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물은 드디어 그의 가슴까지 차올랐습니다.
'럼주차'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달, 남자의 충동, 그리고 밀물을 소재로 한 소설은 학교 다닐 때 배운 밀물과 썰물의 원리에 대해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살았습니다. 운 좋게도 그날 반달이 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보름달이나 초승달이 뜬 밤이었다면 아마도 그가 무사히 집에 돌아오기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달의 인력으로 발생하는 밀물과 썰물. 지구와 달과 태양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보름달이나 초승달에는 당기는 힘이 더 커지고 달이 지구와 태양과 직각을 이루는 위치에 있는 반달일 때는 그 힘도 줄어들어 만조 때의 물 높이가 낮아지게 됩니다. 작가가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소설 속의 달을 반달로 설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가 집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4시 30분이었습니다.
달의 인력과 지구의 원심력으로 일어나는 밀물과 썰물은 하루 두 번씩 네 차례 일어납니다. 지구가 자전을 하기 때문입니다. 만조에서 간조를 거치고 다시 만조에서 간조를 거쳐 만조가 되는 다음날. 물때는 전날보다 50분 늦어집니다. 그 사이에 달도 조금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물때와 물때 사이의 시간 간격을 계산해 보면 한밤중에 바닷길을 건너려던 A의 결정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도 가늠해 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문학은 결코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독자를 이끌어 주기도 합니다. 문학작품의 감동 뒤에 과학적 분석이 날을 세우기도 하니까요. 지금도 지구 한편에서 밀물과 썰물을 만들고 있는 달. 우리의 마음속에서 감성과 이성이 들락날락 거리게 하는 것 또한 달의 인력 때문은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백옥경/구미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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