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살아간다는 것

2월에 곡괭이질을 해보면 땅이 꽁꽁 얼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며칠 날씨가 따뜻해 겉흙이 푸슬푸슬 하다 싶어도 한 꺼풀만 걷어내고 보면 곡괭이 날이 돌에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난다.

3월이면 땅은 눈에 띄게 달라진다. 무쇠 곡괭이 날조차 파고 들 수 없었던 흙은 어느새 부드럽고 헐거워져 가녀린 씨앗들이 다투어 싹을 틔운다. 봄날 땅 위로 고개를 내민 새싹을 보고 사람들은 '씨앗은 힘이 세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씨앗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곡괭이 날조차 파고 들 수 없던 땅에서 저 혼자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니다. 농사 8단쯤 되는 농부라도 꽁꽁 언 땅에서 씨앗을 싹 트게 할 수는 없다.

봄이 올 때쯤 땅은 밤에는 얼고 낮에는 녹기를 반복한다. 알다시피 얼음은 물보다 부피가 크다. 같은 질량이라도 얼음이 차지하는 공간이 물이 차지하는 공간보다 크다는 말이다. 그래서 얼음이 녹아 물이 되면 흙에는 빈 곳이 생기기 마련이다. 밤에 물이 얼고 낮에 녹기를 반복하는 동안 땅속에는 공간이 점점 늘어나고 결국 땅은 헐거워진다. 흙이 부드러워진 뒤에야 싹은 비로소 땅 위로 고개를 내민다.

흙만 부드러워졌다고 씨앗이 싹 트는 것은 아니다. 씨앗에 따라 필요로 하는 온도와 습도가 다르다. 밝아야 싹이 트는 것이 있고, 어두워야 싹이 트는 것도 있다. 한겨울 추위를 겪어야 싹이 트는 씨앗도 있다. 씨앗 하나를 싹 틔우기 위해서 해와 달, 낮과 밤, 물과 얼음, 밝음과 어둠, 그러니까 온 세상이 응원하는 것이다.

햇빛은 씨앗을 싹 틔우기 위해 땅으로 쏟아지는 것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싹이 트는 것을 돕는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는 것 역시 씨앗이 싹 트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사람은 생존조차 힘들지만, 함께 어울려 사는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웃을 도와 많은 일을 행하게 한다. 먹고살기 위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내 집 마련을 위해 행하는 일들은 스스로를 돕는 행위인 동시에 이웃을 돕는 행위인 셈이다.

그러니 특별한 업적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일이며, 존중받을 일이다.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낸 우리 모두는 칭찬 받을 자격이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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