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12일 오후 대구 달서구 한 초등학교 건물 입구. 알록달록한 포스터 10여 개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14일 열린 이 학교 전교어린이회 임원 선거 입후보자의 공약을 담은 것이었다. 포스터에 붙은 사진 중 일부는 선거를 위해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거나 성인 선거 벽보 사진을 흉내 낸 것도 있었다. 저마다 '왕따'폭력없는 학교', '깨끗한 학교를 위해 봉사하겠다' 등 공약을 내세우며 한 표를 호소하고 있었다.
신학기를 맞은 초등학교에 선거 열풍이 불고 있다. 성인 정치판과 다를 바 없는 선거전 양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공약이나 리더십에 호소하는 공명정대한 선거보다 '돈 선거'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 우려 목소리가 높다.
◆성인 정치 축소판=학기 시작과 더불어 어김없이 치러지는 학급 임원과 전교어린이회장단 선거에도 후보자 등록과 선거운동, 유세에 이르기까지 정치 바람이 불었다. 대구지역 상당수 초등학교는 선거를 일주일 정도 앞두고 후보 등록을 마감한다. 학칙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후보 마감 뒤 주어지는 선거운동 기간은 2, 3일 정도에 불과해 짧은 기간에 승부를 보려는 후보자와 선거운동원 등 지지세력의 선거전은 대선 열기 못지않다. 특히 전교어린이회장 선거에 나설 후보 학생은 지지표 확보를 위해 적잖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 총력전을 펼친다.
이 때문에 성인들의 선거처럼 '선거법 위반'을 이유로 당선 무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선거 입후보자가 선거운동 중 급우들에게 먹을거리를 '접대'했다는 사실이 임명장 수여 뒤 밝혀지면서 당선 무효가 된 것. 초교 교사 최모(30'여'대구 수성구) 씨는 "투표함을 1년간 보관하다가 학부모가 부정 선거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면 투표용지를 공개하는 등 최근 초등학교 임원 선거는 대통령선거를 방불케 한다"고 말했다.
한 초등학교는 전교어린이 회장 선거 소견 발표 중 음향에 문제가 생겨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중간 중간 끊어져 알아듣기 어려웠던 연설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선거를 진행할 것인지, 해당 후보학생에게 유세 기회를 두 번 부여할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 것. 결국 상대 후보자 학부모의 동의를 얻어 방송 유세를 두 번 치르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부 학부모들은 중'고교 및 대학 입시에 제출할 자기소개서 등에서 가산점을 받으려고, 교사나 학교 측에 자녀의 책임감 등을 부각시켜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출마할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1, 2학년생의 경우 정원이 30명 정도인 한 반에서 20명 이상이 출마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 초교 교사 이모(32'여'대구 수성구 만촌동) 씨는 "저학년 학생 상당수는 회장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부모에게 등 떠밀려 입후보하고 있다"며 "초등학교 임원 선거가 후보의 리더십이나 책임감보다 학부모의 경제력에 좌우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돈에 울고 웃는 회장 선거=허술하게 준비했다가 고배를 마신 학부모는 절치부심하기도 한다. 연설문 과외를 받거나 논술학원 등에 연설문 작성을 의뢰하기도 해 일부 학교에서는 임원 선거를 위한 사교육이 암암리에 행해지기도 한다는 것. 대구지역에서도 수년 전부터 스핀닥터(선거전략전문가)도 생겨나 전교어린이회장 선거에 대비 스피치과외나 학원 형태로 운영되기도 하고 연설아카데미 강좌도 개설됐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도 '초등학교 회장 선거 연설문'을 검색하면 공약 별로 분류하거나 유머'유행어'근면'성실'봉사'책임 등 맞춤형 연설문을 찾아볼 수 있다.
벽보와 피켓도 필수품이 됐다. 관련 업체에 문의한 결과 4절지 크기 기준 벽보는 1장당 2만원, 피켓은 1개당 2만5천원 안팎이었다. 학부모들은 손 글씨보다 깔끔하고 세련돼 선거 유세에서 눈길을 끌 수 있다고 판단해 각각 1~5개 정도씩 주문하고 있었다.
달서구 성당동 한 POP 제작업체 직원은 "최근 들어서는 신학기가 되면 초등학교 전교어린이회 선거도구 제작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며 "이번 주는 주문이 밀려 추가 주문 제작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구교육청 교육과정운영과 관계자는 "진로'특기'적성 등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어린이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면 오히려 학생의 학습 및 학교 생활에 대한 의욕이 오히려 저하될 수 있다"며 "연령에 맞는 즐거움을 찾고 학교 생활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가정과 학교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지현기자 everyda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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