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야기 속으로] 아버지

▶ 높은 벽 같던 아버지, 20대 들어 고마움 느껴

'아버지'는 어린 시절 저에게 높고 단단한 벽이었습니다. 특히 사춘기 때 아버지에 대한 저의 저항은 아무런 이유 없이 커져만 갔죠. 아버지는 중학교 선생님이셨어요. 그래서 학교 선생님을 향한 불만이 엄하기만 하셨던 아버지에게도 향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집을 떠난 지 2년 정도 됐을 때쯤, 아버지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곧장 휴가를 내 집에 가서 마주한 아버지의 모습에는 퇴직하실 때까지 자식들 키운다고 고생하신 흔적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마에 새겨진 주름 하나하나, 그리고 언제나 건강하실 거라고 생각했던 아버지께서 기운 없이 침상에 누워 계신 모습. 20대 중반이 되고 나서야 철이 들었는지 그 순간 저의 눈가를 적시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휴가 동안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 아버지에 대한 걱정 속에서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몇 개월 뒤 아버지께서 건강을 회복했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안심이 됐습니다.

저는 다니던 직장을 잠시 그만두고 다시 학업을 시작했고, 최근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부모님께서 딸의 졸업식을 축하해주시려고 서울에 오셨어요. 사진 속 모습입니다.

한평생 살면서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아무런 내색도 없으셨던 아버지. 졸업식 주인공은 제가 아닌 바로 아버지 당신이라고 말씀드리지는 못했지만, 이 사진 한 장 속 아버지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저의 그러한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듯해서 뿌듯합니다. 아버지! 감사드리고 사랑합니다.

조희정(대구 달서구 상인1동)

▶암 투병 중인 아버지에게 희망의 빛이 들기를

기저귀 등 짐을 이것저것 챙겨 등에 메고, 딸아이는 앞에 안고서 버스로 40분 정도 거리인 친정으로 향한다.

아빠는 지난해 8월 위암 4기 판정을 받으셨다. 75년 평생 건강을 자신하며 건강검진 한 번 받지 않으셨던 아빠를 보고 가족들은 모두 한동안 넋을 잃고 지냈다.

아빠는 "가족들 고생시키기 싫다"며 항암치료를 거부하셨다. 그러다 가족들의 설득 끝에 치료를 시작하셨고, 지난달까지 8차례의 항암치료를 무사히 견디셨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아빠는 예전처럼 엄마와 함께 동네 구멍가게를 보셨다. 내 밥 챙겨 먹기도 귀찮은 연세에 엄마는 어떻게든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드시게 하려고 아빠를 위해 온갖 음식을 상에 올리신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항암치료를 거부하셨던 아빠는 며칠 전 엄마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치료가 좀 잘 돼서 아들 부장판사 될 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 겨우 2년 정도만 기다리시면 될 일인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구멍가게를 운영하시면서도 부모님은 지금껏 남한테 빚 한 번 져보신 적 없고, 우리 3남매 대학공부 다 시키시고, 시집'장가도 보내셨다.

지금 부모님을 위해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 가슴 아프고 죄송스럽다. 부모님은 자식들 귀찮고 번거롭게 만든다며 우리 3남매 집에도 잘 오시지 않는다. 지난달 치료차 서울 언니네 집에 다녀오시면서 언니한테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이번이 내가 큰딸 집에 마지막으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단 항암치료는 모두 마치셨기에 당분간 아빠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다. 병원에서는 생존율이 10%라고 한다. 이 안에 아빠가 꼭 들어가 기적을 보여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빠는 여전히 멋있고 젊으시다.

서미화(대구 달성군 다사읍)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