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부석사에서

부석사에서

윤제림(1960~)

이륙하려다 다시 내려앉았소,

귀환이 늦어질 것 같구려

달이 너무 밝아서 떠나지 못했다는 것은 핑계, 실은

사과꽃 피는 것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차일피일

결국은 또 한철을 다 보내고 있다오

누가 와서 물으면 지구의 어떤 일은

우주의 문자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지구의 어떤 풍경은 외계의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는다고만 말해주오

지구가 점점 못쓰게 되어 간다는 소문은 대부분 사실인데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것들이 너무 많소

어르고 달래면 생각보다 오래 꽃이 피고

열매는 쉬지 않고 붉어질 것이오

급히 손보아야 할 곳이 있어서 이만 줄이겠소

참, 사과꽃은 당신을 많이 닮았다오.

-계간 '시인동네', 2013년 봄호.

이 시의 주인공은 하느님 같다. "지구가 점점 못쓰게 되어 간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조사를 나온 정황이 잡힌다. 메모도 하고 카메라에 담기도 하며 꼼꼼하게 체크를 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꽤 낭만적인 하느님이다. 귀환하려다 다시 무질러 앉은 까닭이 사과꽃을 한 번 더 보려는 데 있다니. 그것도 이 전언을 듣는 짝을 닮은 꽃이라 하니 어쩌겠는가. 추가로 한철 출장 외박을 무난히 허가받은 모양새다. 업무 또한 바쁘다. 소식을 전하는 와중에도 손볼 것이 터진 것이다. 이쯤 되면 하느님의 짝지도 독수공방을 감수하고 오롯이 기다릴밖에. 지구를 박살 내고 있는 아무리 못돼먹은 인간이라 해도 이런 하느님을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곧 춘삼월 청명지절이다. 사과꽃도 볼 겸 부석사로 가서 이 멋진 하느님과 한 잔 해야겠다. 달 뜨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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