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봄, 적멸보궁 가는 길

얼마만큼 가야 그의 눈을 닮을 수 있을까요? '바다에 처음 닿는 강물의 속살처럼 긴장된다'는 떨림보다 몇백 배의 떨림이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부터 전해져 옵니다. 순결한 여인의 속곳을 들여다보는 달뜬 남정네의 심정도 아니고 그저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신 안의 나'를 내려놓겠다는 그 여행기가 왜 첫 문장부터 내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갖는 각기 다른 슬픔의 종류와 뿌리까지 느낀다'는 작가에게서 도대체 세상을 저 정도까지 통찰하려면 얼마나 크고 많은 슬픔의 상황과 맞닥트려야 했는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슬픔이 밥이고 힘'이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그 정도쯤의 슬픔을 견딘 흔적은 있으니까요.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설렘으로 가득한 이 봄. 이산하 시인의 '적멸보궁 가는 길'을 마주하고 글 안에 난 길을 따라가며 이 환한 봄에 내가 느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합니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곳인 적멸보궁이 그러하듯, 산자락이거나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고찰의 추녀 아래에서 풍경소리를 듣는 듯 책의 길은 참 고즈넉합니다. 오래 묵은 고목 하나, 생활예술의 백미 같은 원통보전의 담장 하나, 먼바다에 깨우침의 화두를 보내는 관음보살의 눈길 하나, 바다를 따라 흐르듯 나있는 길 하나…, 길 따라 발 따라 만나는 자연들, 사물들 그것들이 모두 그 속에서 적멸보궁 하나씩 가진 부처의 집이란 걸 작가는 드러내지 않고도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매년 그랬습니다. 유난히도 겨울을 빠져나오는 터널이 참 길었다고.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해마다 겨울이 유난히도 혹독했고 길다고 느꼈습니다. 그 유난스런 겨울의 터널을 올해도 여전히 지났지만, 올해는 여기에 더해 나의 적멸보궁을 찾아내야 하는 나이에 도달했다는 걸 깨닫습니다. '적멸보궁 가는 길'은 바로 그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함께 전국의 사찰을 다녔던 '백구두 신고 소주 마시던 땡추중'이라는 스님의 화두처럼 '지나가는 것이 다 헛되고 헛된 것인가' 이런 고차원적 물음도 슬쩍 해보면서 말입니다.

아, 참 글이 어렵게 풀어지는군요. 그리 어린 나이도 아니고 아직은 세상의 허무를 느낄 나이도 아닌 아주 어정쩡한 나이인데 이거 참 괜한 무게로 스스로 짓눌러버리는군요. '적멸보궁'이라는 단어에 너무 꽂혔나 봅니다. 아무튼 어떤 영화 포스터에 쓰여 있더군요. '잊기 위해 걷고 그리워서 또 걷는다'고.

하루는 하루라는 길을 걷는 것이고, 일 년은 일 년의 길을 걷는 것이지요. 그렇게 걷다 보면 십 년, 이십 년, 사십 년 그리고 훌쩍 오십 년의 길을 가겠지요. 그게 두려운 거지요. 그걸 잊기 위해 지난 것에 대한 그리움을 찾듯 내 안의 적멸보궁을 찾는 거지요. 그래서 책의 저자인 이산하 시인에게 전화했습니다. "선생님의 '적멸보궁'이란 뭔가요?" 하고 뜬금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정말로 뜬금없는 질문에 허허 웃으시더니 "현실에서 찾는 유토피아지" 하십니다. '아! 유토피아…,' 그 환상적인, 몸도 마음도 그저 행복하기만 한…, 그것이 적멸보궁….

그러고 보니 산사 기행을 묶은 책인 '적멸보궁 가는 길'에는 엉뚱한 작가의 해학에 웃다가도 머리를 치는 순간의 깨달음과 사소한 것들에서 발견하는 삶의 철학 같은 것이 곳곳에 들꽃처럼 불쑥불쑥 피어 있었습니다. 작가의 내공을 역력히 느낄 수 있게 말입니다. 아무튼 이 봄날, 내 현실의 적멸보궁은 뭘까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곤 예전에 퍼포먼스를 위해 썼던 시 한 수를 찾아봅니다. 관객들의 신발 한 짝씩을 벗겨 검은 항아리 속에 넣고 펼치는 퍼포먼스를 위한 시, '독 속의 사랑-구두'라는 졸작을 읽어보고 읽어보며 내 안의 적멸보궁이 어쩌면 '현재 이 시간, 이 자리'임을 어렴풋하게 깨닫습니다.

이 환장할 봄날에, 마침내 이기고 돌아온 개선장군 같은 봄날에, 적멸보궁을 둘러싸고 봄꽃은 피고….

권미강/경북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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