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해의 窓] 섬안마을 유래비 건립

포항 섬안 마을에서 유래비 건립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포항의 형성은 5도 3호에서 비롯되었다. 조금은 낭만적일 수도 있는 다섯 개의 섬과 세 개의 호수가 포항의 시작이었다.

형산강이 양산멱을 지나 영일만과 만나면서 넓고 기름진 삼각주를 만들었다. 여러 갈래로 흩어진 물줄기 사이로, 맏이처럼 가장 먼저 드러난 땅이 상도였으며, 이어서 하도 분도, 죽도 해도가 생겨났으리라.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형산강을 어미로, 영일만을 아비로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포항이라는 터전이 만들어진 셈이다. 섬안의 첫 마을인 상도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물길 따라온 포구나무를 세우고, 마을을 이룬 지 300여 년. 봄이면 물안개 피어나던 형산강, 칠성강. 여름이면 물새 서걱대던 갈 숲, 가을이면 오곡 넘실대던 들녘. 철철이 평화롭고 풍요롭기만 했다. 사람도 이를 닮아 순후한 인심으로 서로를 다독이며, 후생 길러내기에 연년세세 정성을 다하였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사실만 보아도 섬안 사람들의 삶은 가히 포항의 역사라 할 수 있었다.

1700년대 중반 무렵 섬안마을이 개척되어 1871년 영일현 고읍면 도내리라는 첫 행정구역 명칭을 얻었으며, 1902년 최익수(崔翊洙)에 의해 포항 근대교육의 효시인 호상(湖上)학교가 설립되었다. 민족교육을 지향했던 호상학교는 190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으나 그 건물은 197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 후 1914년 형산강 제방 축조 공사가 진행되면서 섬안들은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대부분의 주민은 작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1922년 상도, 대도청년회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항일 운동을 펼쳐 나갔다. 6'25전쟁 때에는 최후 방어선이었던 워크라인의 한가운데서 포항을 지켜냈으며, 산업화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이처럼 섬안마을은 포항의 시작에 그치지 않고 역사 발전에도 늘 함께해 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대화에 밀려서 전통문화가 사라지고 있지만 1947년에 설립된 제당과 당산목을 지금껏 챙겨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옛 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좀 더 시간이 지나가면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몇몇 사람들이 마을 유래비를 세워서 조상들의 삶과 정신을 전하려고 한다.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이는 단순히 섬안마을의 일이 아니라 포항시가 진작에 서둘러야 할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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