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버스로 그리는 경북 스케치] <13>세월이 느리게 걷는 길, 의성

큼지막한 대야에 도다리·숭어 펄쩍…산간 내륙서 싱싱회 맛보다

봄은 농부의 손끝을 타고 온다. 봄 들녘 위로 퇴비를 뿌리고 겨우내 굳었던 땅을 뒤집는 농부의 손길이 바쁘게 움직인다. 한결 포근해진 햇살 사이로 여전히 시린 바람은 스며들지만 계절의 변화를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상주에서 의성으로 이동하는 길은 꽤나 번거로웠다. 상주의 마지막 기점이었던 사벌면 경천대에서 예천군 풍양면을 거쳐 다시 의성군 다인면으로 넘어가야 한다. 오전 10시 40분 풍양버스정류소를 출발해 25분 만에 다인면에 도착, 15분을 기다려 안계면으로 가는 버스로 환승했다. 농어촌버스가 풍양에서 다인은 하루 6회, 다인에서 안계까지는 10차례 운행한다.

◆금성산고분군과 문익점면작기념비

다인면과 안계면에는 둘러볼 곳이 마땅치 않다. 의성읍으로 가는 길에 봉양면을 거쳐 금성면에 들르기로 했다. 금성면에는 국보 제77호인 탑리 오층석탑과 금성산 고분군이 있다. 안계에서 봉양으로 가는 버스는 30분~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봉양은 대구에서 의성으로 가는 관문이다. 중앙고속도로 의성IC가 있고, 안동으로 가는 5번 국도와도 가깝다. 사실 봉양은 도리원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곳이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 도리원(都里院)이라는 얘기도 있고, 1920년대 시장을 옮기면서 복숭아와 오얏나무가 많아 '도리원(桃李院)시장'이라 불렸다는 말도 있다.

안계에서 낮 12시 30분 버스를 타고 25분 정도 달려 봉양에 도착했다. 버스 요금은 2천700원. 의성에서 시내버스는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달라진다. 봉양면 소재지에는 의성 마늘소 먹거리 타운이 있다. 축협 직매장에서 쇠고기를 구입한 뒤 도로변에 있는 전문식당을 찾아가 구워먹는 식이다. 혼자 고기를 구워먹을 정도로 대범하진 못한 터라 군침만 삼킬 수밖에 없었다.

금성면 탑리리는 버스로 25분 거리다. 탑리여중 바로 옆에 오층석탑이 있지만 웬걸, 보수 공사가 한창이다. 탑 주변에는 흰 장막을 덮어 내부를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금성산고분군으로 발길을 돌렸다. 금성면사무소를 지나 1.2㎞가량 걸어가면 대리삼거리와 마을이 나오는데 마을 안쪽길로 200m가량 들어가면 된다. 마을길을 올라오면 탁 트인 낮은 언덕 위로 옛 무덤들이 봉긋봉긋 솟아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고분은 삼한시대 부족국가였던 조문국의 경덕왕릉이다. 이 일대에 산재한 고분은 200여 기. 화려하거나 거대하지 않아 차분하게 걸으며 돌아보기 좋다. 고분군 곳곳에는 계절에 풀이 죽은 꽃들의 줄기만 남아 있다. 고분군 전망대 옆에는 문익점 면작기념비가 있다. 문익점의 손자 승로가 의성현감에 부임해 면화를 파종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사람 향기 물씬 나는 의성장터

고분군에서 의성 방향으로 200m가량 걸어가면 학미1리 정류장이 있다. 오후 3시 40분쯤 버스를 타고 20분을 달리면 의성읍이다. 매월 끝날이 2, 7일은 의성장이 열린다. 읍소재지로 들어오자마자 내리면 된다. 마침 의성 장날이었다.

장날에는 아이들도 즐겁다. 엄마 치마단을 붙잡은 아이가 어묵을 질겅거리며 졸랑졸랑 엄마를 따라다닌다. 즉석에서 어묵을 튀겨 파는 가게 앞에는 교복을 입을 학생들이 수다를 떨며 순서를 기다렸다. 금성방앗간 앞 골목길엔 포대로 둘러싼 낡은 의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방앗간을 찾은 어르신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장소다.

특이하게도 시장 한쪽에서 활어를 슥슥 썰어 판다. 교통이 불편한 경북 내륙에서 파는 활어라니. 큼지막한 고무 대야에는 도다리와 숭어, 청어가 이리저리 헤엄을 쳤다. 장터 구석에서 곡식 한 포대를 내놓고 파는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흥정을 하지만 사는 이는 별로 없다. "이게 뭐예요?" 가까이서 보니 흑미다. "이거 가가요. 만원." "좀 비싼 것 같은데요?" "아이라, 이거 찰흑미인데 내가 직접 지어서 말린 거라. 전기로 말린 거하고는 맛이 완전히 달라요." 살 마음이 없다는 눈치를 챘는지 할머니는 이내 말문을 닫았다.

자리를 뜨려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할머니가 말을 붙였다. 대파를 조금 내놓았는데, 다른 가게에서 파는 대파의 반 토막 정도 크기다. "할머니, 얘들은 왜 이렇게 작아요?" "이거 조선파라요. 조선파. 뿌리 좀 봐요." 가만히 보니 파 크기보다 뿌리가 훨씬 길고 굵다. 봄 돼서 조금 자란 파를 뽑아왔단다. "오늘 아침에 밭에서 뽑아온 건데 이게 진짜 맛있는 파라. 이거 집에 가져가서 땅에 묻어놓고 계속 키워가문서 먹으면 되니더." 난감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뜨자 할머니가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이건 사가도 집에서 꾸지람 안 듣는다니까."

◆성냥 한 개비에 들어간 수많은 손길

의성전통시장에서 의성향교 쪽으로 10분만 걸어가면 국내 유일의 성냥공장인 성광성냥공업사를 찾을 수 있다. 공장 안은 의외로 조용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에 30년은 훌쩍 넘은 듯한 창문. 여기저기 바래고 벗겨진 건물 대여섯 동이 모여 있다. 입구에는 색이 바래 알아보기 힘든 '성광성냥공업사'라는 나무문패가 걸려 있다.

1954년 설립된 성냥공장은 예상외로 조용했다. 주문 생산만 하는데다 그나마도 주문량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아름드리 이태리포플러 나무를 잘라 성냥개비를 만들고 포장곽에 담는 작업이 모두 이뤄진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성냥이지만 성냥 한 개비가 나오기까지는 10단계 이상의 손을 거쳐야 한다. 공장 뒤편에는 굵은 통나무들이 쌓여 있다. 모두 울진에서 공수한 이태리포플러 나무들이다. 먼저 이 나무를 한 자 두 치(약 36㎝) 크기로 잘라낸다. 자른 나무는 공장 건물 내로 이동해 껍질을 벗기고, 묵기 기계에서 얇게 저며 판자 모양으로 만든다. 이 나무를 다시 성냥개비 크기로 잘라낸 뒤 약품을 묻혀 성냥개비에 불씨가 남지 않도록 처리한다. 자른 성냥개비는 구부러지지 않도록 보일러에서 잘 말리고 나뭇개비끼리 부딪히는 미각기를 통해 연마한다. 이어 왕발기는 규격에 맞지 않는 성냥개비를 골라낸다. 이렇게 여러 단계를 거쳐 만든 성냥개비는 '연속 자동성냥제조기'에 넣어 끝 부분에 자동으로 약제를 찍어 만든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약제를 묻힌 성냥개비는 입각기에 넣어 성냥통의 크기별로 넣어 포장한다. 예전에는 이 작업을 모두 사람의 손으로 했다. 요즘은 생산량이 많지 않고, 직원 수가 적어 각 공정을 한 번에 진행하지 않고 순서에 따라 나눠서 작업한다. 이렇게 만든 성냥은 주로 사찰이나 다방 등으로 판매된다.

◆타들어가는 성냥 불빛 꺼뜨리지 않으려면

성광성냥공업사에서 생산하는 성냥은 뱃사람들이 습기에 강하다며 좋아했던 '향로 목각'이다. 새 모양의 신라청동향로 위에 불이 활활 타는 모습을 상표에 담은 제품이다. 유일하게 국내에서 생산되는 성냥이기도 하다.

이 공장을 세운 건 이북에서 온 피란민들이었다. 공동창립자 4명이 1954년 설립했고, 손진국(77) 대표는 열여덟 살에 창립 멤버로 입사했다. 60년 동안 성냥공장에서 인생을 바친 셈이다. 성냥개비에 약제를 바르는 일만 18년간 하다가 1970년 300만원을 넣고 투자자가 됐고, 공장장, 상무, 전무, 대표이사가 됐다.

"1970년대는 소달구지에 성냥을 싣고 안계면이나 금성면까지 배달을 다녔어요. 트럭이 나온 이후에는 전국은 물론 제주도까지 판매를 했고요. 그때는 굉장히 좋았지."

수작업에 의존하던 생산 설비가 기계화된 건 1980년이다. 손 대표가 사무실에서 장부 10여 권을 들고 나왔다. 검은색 표지에 끈으로 묶은 오래된 서류철에는 지금까지 자재나 기계를 구입한 목록과 금액이 정갈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장부에는 당시 자동성냥제조기 도입 가격이 8천500만원이라고 돼 있다.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1982년에도 7천500만원을 주고 자동성냥제조기를 한 대 더 주문했다. 하지만 거금을 들여 기계를 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냥산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30여 개나 되는 성냥공장들이 출혈 경쟁을 벌였고, 일회용 가스라이터와 가스레인지의 등장과 함께 수요마저 줄었다. 1970년대 162명이던 직원도 10명밖에 남지 않았다. 한때 연간 5억~6억원 매출도 옛날 일이 됐다. 기계 1대도 5천만원을 받고 인도네시아로 팔았다. 남은 제조기와 축렬기는 국내에서 유일한 기계다. 요즘은 주로 다방 판촉물이나 양초를 많이 쓰는 사찰의 주문을 받아 생산한다. "나도 8년 전에 그만두려 했어요.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 일생을 바친 공장이 아닙니까. 문 닫을 순 없으니 제가 한번 해보겠다'고 해요. 그래서 맡겼지."

손 대표의 소망은 성냥공장이 이대로 사라지지 않는 일이다. "요즘 어린 학생들은 성냥 자체를 모르잖아요. 그래도 국내에서 유일한 기계인데 잘 보존해서 아이들의 교육 장소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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