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풀밭 위의 식사

시모노세키 풍경 속 해변 잔디밭서 즐긴 멋진 식사

"할머니 할아버지, 일본 여행 같이 가요."

손주 녀석의 요청에 멋모르고 따라나섰다. 행선지가 기타큐슈(北九州)란 말만 들었을 뿐 구체적 일정은 전혀 몰랐다. 하기야 인생의 가는 길이 항상 미지의 세계이듯 조손(祖孫) 3대의 여행 스케줄을 시시콜콜 물을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몇 마디 말이 생각났다. "사람이 무엇을 원해야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는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 "인간은 오직 한 번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에 따라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다. 따라서 그의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작가의 말대로 굳이 알려고 하지 않고 바람이 물결을 만들어 흔드는 대로 몸을 맡기기로 했다. 안달하지 않는 삶은 이렇게 편안하다.

미지의 길은 신선했다.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축소 지향의 일본'이라더니 기타큐슈의 선 스카이 호텔 방은 됫박만 했지만 착한 가격이 불편함을 상쇄시켜 주었다. 호텔의 일본식 조식은 먹을 만했다. 점심과 저녁은 전통시장의 우동이나 슈퍼마켓의 초밥으로 때웠다.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스스로 선택해 먹으니까 값싸고 맛있었다. 큰 버스를 타고 투어 팀을 따라다니며 맛없는 대형식당의 음식을 먹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이동하는 교통편은 'BMW'만 타기로 했다. 버스와 메트로 그리고 워킹, 이 얼마나 근사한 여행인가. 오전 9시에 호텔 셔틀버스가 고쿠라(小倉)역에 태워주면 해가 빠질 때까지 돌아다니다 흐느적거리며 돌아온다. 걷다가 먹을 만한 게 눈에 띄면 작은 것은 여섯 개, 큰 것은 세 개를 사서 나눠 먹고 피곤하면 소공원 벤치에서 쉰다. 탄가시장 내 탄가 우동집의 어묵과 소바는 별미였다. 시장 입구의 문어 한 토막이 들어 있는 국화빵처럼 생긴 다코야키도 먹을 만했다. 배고플 여가가 없었다.

이튿날, 고쿠라역에서 시모노세키행 열차(JR선)를 탔다. 요금은 270엔. 열차가 한두 개의 역을 거쳐 도심을 통과한 후 길이 1㎞ 정도의 간몬해협을 해저터널로 건너왔는데도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산에서 아주 가까운 시모노세키의 구릉과 산들은 우리의 산천을 쏘옥 빼닮아 있었다. 길옆 일본식 주택만 아니면 한국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역에서 2층짜리 런던버스(1인당 210엔)를 타고 가라토시장으로 간다. 가라토시장은 시모노세키의 명물로 금'토'일요일과 일본의 국가 공휴일에는 야외 풀밭 아무 데서나 식사를 할 수 있는 대형 어시장이다. 여긴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 삼면이 바다인 시모노세키는 어자원이 풍성하여 가게마다 싱싱한 생선들이 초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시장 안은 발 들여 놓을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고 가득 쌓여 있는 음식도 순식간에 텅텅 비워지고 있었다.

첫눈에 들어온 것이 복어였다. 그 외에도 고래'문어'낙지'오징어'고등어'꽁치'게 등 온갖 생선들이 정말 푸짐했다. 우린 일단 어시장을 한 바퀴 둘러본 후 무엇으로 점심을 해결할지 긴급회의를 열었다. 노년과 장년과 소년들의 식성이 모두 달랐다. 결국 세대별로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자신이 먹고 싶은 한 개에 100엔 내지 300엔짜리 초밥과 우동을 사오기로 했다.

가라토시장의 남쪽 해변에는 잔디밭과 나무판자로 만든 앉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시장에서 먹거리를 사온 관광객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마네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풀밭 위의 식사' 장면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세어 보지는 못했지만 200~300여 명이 무질서하게 보이는 묘한 질서 속에서 시모노세키의 명물인 생선초밥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의자 몇 개 내주고 초고추장과 야채를 파는 가게들이 판을 쳤을 텐데. 일본과 한국이 다른 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 내외는 복어껍질과 고등어, 문어, 새우초밥을, 손주 녀석들은 우동과 튀김을, 아들 내외는 또 다른 생선초밥을 펼쳐놓고 시모노세키 항구가 그려둔 풍경 속에 앉아 아름다운 시간 속으로 흔들리며 떠내려가고 있었다. 여행용 참소주 한 병으론 내 풍류와 흥취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마치 논문 제목과 같은 '풀밭 위에서 먹는 생선초밥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구름을 밀고 가는 바람도, 바다 위를 배회하는 갈매기도 그 해답을 쉽게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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