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의 음반이란 음반을 모조리 수집하던 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와 이런저런 방담을 나누다가 문득 가수 황금심(黃琴心'1922~2001)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졌지요. 그런데 선배는 대뜸 "그녀는 한국의 마리아 칼라스였어!"라는 충격적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1923~1977)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전 세계 음악팬들에게 커다란 인기를 누린 프리마돈나 가수로 그야말로 오페라의 전설이었지요.
그리스 이주민의 딸로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이혼 등을 비롯한 삶의 파란으로 인해서 많은 시달림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달림은 칼라스의 예술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음악의 감성을 정확히 표현하는 힘, 매력적인 음색은 마리아 칼라스의 상표처럼 여겨졌지요. 여기에다 우아한 용모, 스타로서의 기품까지 갖추어 그야말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오페라가수로 인정받았습니다.
저는 곧 선배의 말에 딴죽을 걸었습니다. 아무리 황금심 노래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어찌 마리아 칼라스에 비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선배의 표정은 결연했습니다. 황금심 음반을 다시금 귀 기울여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들어보라는 충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충고를 들으면서도 저의 속마음은 못내 기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항상 서양 음악에만 심취해 오던 선배의 관점 내부에 이렇게도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뜻밖의 놀라운 시각과 애착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1960년대 황금심 절정기에 취입한 음반을 마그나복스 장 전축에 걸어놓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몇 시간이고 들었습니다. 고즈넉한 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황금심의 노래는 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처연하게 스며 들어와 저의 아프고 쓰라린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도달한 결론은 과연 선배의 지적에 일리가 있다는 동의와 공감이었습니다.
황금심 음반을 듣던 중에 저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하나의 아련한 실루엣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제가 소년 시절이었던 1960년대 초반, 한옥 고가에서 아버님과 함께 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마당에는 벽오동 한 그루가 우뚝 서서 바람 소리를 내고 있었지요. 힘겨운 가계에 보태기 위해 아버님께서는 꽃밭이 있던 담장 쪽 공터에 새로 방을 넣으셨습니다. 그 방에 40대 중반의 여인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세를 들어 살았습니다. 여인은 아마도 과수댁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전축에다 곧장 황금심 음반을 올려놓고, 앞뒷면을 돌려가며 오후 해질 무렵까지 듣고 또 듣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습니다. 청소를 할 때도 저녁밥을 지을 때도, 한가한 시간 방바닥에 홀로 누워 있을 때도 오로지 황금심만 들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도 황금심 노래만 들으면 그 과수댁 여인의 기억이 먼저 떠오릅니다. 당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과수댁의 복잡하고 힘든 삶의 무게를 지탱해준 힘의 원천은 필시 황금심 노래였을 것이라고 이제 어른이 된 저는 어렴풋이 짐작을 하는 것이지요.
본명이 황금동(黃金童)이었던 가수 황금심은 1922년 부산 동래 출생입니다. 그러나 어려서 부모를 따라 서울 청진동으로 이주했었고, 7세에 덕수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4세가 되었을 때 축음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너무도 좋아했는데, 어느 날 동네의 음반가게 점원이 골목을 지나다가 소녀의 기가 막힌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입소문이 레코드사에까지 전해졌고, 마침 오케레코드사 전속가수 선발 모집이 있었는데 거기에 소개를 받아서 황금동은 당당히 1등으로 뽑혔습니다.
이동순(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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