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태흥의 이야기가 있는 음악풍경] 들국화 '그것만의 내 세상'

지난주 수요일 저녁, 사무실로 후배가 찾아왔다. 다니던 직장에 휴가를 내고 보름 일정으로 지난 2월, 네팔의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온 친구였다. "선배,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어요." 커피숍에 앉자마자 그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마흔한 살의 나이, 두 아이의 아버지, 한 여자의 남편이었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이 나라 최고의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서 15년을 넘게 일해 온 그였다. "트레킹 마지막 날, 그냥 펑펑 울었어요." 허리까지 쌓인 눈길을 헤치며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던 날, 스스로에게 도대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울고 말았다고 했다.

커피가 식고 있었다. 트레킹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며칠 뒤, 아이들을 재우고 아내에게 말했을 때, 그녀는 당장 닥쳐올 삶의 궁핍함보다도 오히려 남편을 이해하고 격려하더라고 했다.

문득 8년 전, 안나푸르나를 떠올렸다. 늦은 봄이었다.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겼지만 미혹으로 가득했던 시간, 무엇인가에 대한 갈증으로 견딜 수 없던 날, 작은 배낭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배낭에 넣고 훌훌 떠난 여행이었다. 하루 8시간, 숨을 고를 틈도 없이 히말라야를 오르기 시작했다. 우기를 맞은 산은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 얼굴을 마주하기에는 육신의 고통이 너무나 컸었다.

그렇게 무작정 산을 오르고 열흘이 지났을까? 야크를 키우는 사람들의 움막에서 잠깐 배낭을 내려놓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둥근 낮달이 떠 있었다. 해발 5,164m에서 바라본 낮달은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은빛 설산 위에 말없이 걸려 있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30분쯤 그렇게 숨죽여 울었을까? 포터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무런 말없이 배낭을 지고 일어섰다.

아마 그가 우는 이유를 물었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아무런 답도 못했을 것이다. 때로는 이유 없이 눈물이 나고 아무런 이유 없이 아픔이 밀려오기도 한다. 황동규 시인의 시처럼 '아픔이 없는 삶은 빈 그릇'에 불과하다. 눈물이 없는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그날 밤, 사랑을 잃은 사람처럼 뜬눈으로 꼬박 새우고 동틀 무렵, 밖으로 나왔을 때, 새벽이 푸르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속도전에 목을 매고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 밀려나고 있었다. 새들이 낮게 날고 있었다. 정말 거짓말처럼 지천으로 피어난 들꽃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나보고 그대는 얘기하지/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 봐/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났나 봐/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하지만 후횐 없어 찾아 헤맨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그것만이 내 세상/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나 또한 너에게 얘기하지/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 봐/ 혼자 그렇게 그 길에 남았나 봐/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하지만 후횐 없어 가꿔왔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그것만이 내 세상(들국화 '그것만이 내 세상' 가사 전문)

긴 침묵 끝에 후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선배 사실은 두려워요." 히말라야를 권했던 선배로 잘한 일이라고 말해야 할 책임이 분명 있었고 격려를 보내야만 마땅한 일이었다. 또한 그 역시도 위로받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다시 고려해 보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세상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 것이던가? 그가 겪게 될 좌절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불확실한 미래, 책임져야 할 가족들, 삶의 궁핍함이 그를 덮쳐올 때, 불혹과 미혹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그가 선택할 것이 무엇일까? 두려웠다. 그 어떠한 경우에라도 부디 그의 꿈이 들국화의 노랫말처럼 후회가 없는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만 간절하다.

"선배, 내년엔 꼭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안나푸르나를 가고 싶어요."

우리는 정말 세상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우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아둔하고 오래된 물음이 다시 뇌리를 스친다. 커피숍 유리창 밖으로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깔깔대며 지나간다. 꿈처럼 완연한 봄이다.

전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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