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때론 우물처럼 '갇힌 공간'이 될 때가 있습니다. 고향을 우물 같은 좁디좁은 삶터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물 밖을 내다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눈만이 아닙니다. 큰 가슴, 넓은 생각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고향(대구'경북)은 본디 좁은 우물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의 뿌리를 봐도, 학맥(學脈)의 깊이를 봐도, 기질(氣質)의 담대함을 봐도 결코 작은 우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이웃 마을 사람들이 'TK'니 뭐니 달갑잖은 말들로 꼬나보기 시작했습니다. 40년 집권의 시샘인지 묵은 뿌리가 깊고 굵은 거목에 대한 질시와 거부감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배타적 정서가 우물 바깥을 나가보면 쫙 깔려 있습니다.
대통령을 네 분이나 팍팍 밀어줘서 뽑았었지만 여전히 밥상에는 그 나물에 그 밥만 올라오는데도 말입니다. 신공항이니 무슨 벨트니 같은 국책 사업의 정치적 배려만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하나 짚어보면 교육, 문화, 경제 어느 구석 하나 제대로 대접받은 게 없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찾아내고, 스스로 쟁취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기대고 칭얼대고 응석 부리는 식의 대응으로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이뤄내지도 못합니다.
이제 스스로 큰 눈을 뜨고 우물 밖 세상을 향해 우리 고향의 뚝심을 펴 보일 때입니다. 그리고 '100분 바깥'의 세상을 똑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100분이면 KTX로는 서울을 볼 수 있고 비행기로는 일본과 중국을 만날 수 있습니다. '100분 바깥' 조금만 더 멀리 나가면 2억 명 Y세대(15~29세)를 중심으로 무섭게 변하고 있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제3의 아시안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 아시안 세계로 '제4차 공장 이전'을 시작한 일본은 20년의 잃어버린 세월을 보내고도 아직 전 세계에 빌려준 3조 달러(3천600조 원)의 이자 수익만으로 무역 흑자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고 있습니다. 해외에 사 놓은 보유 자산 7천조(兆) 원에다 국민 개인의 예금 자산은 무려 1경 8천조 원, 독일'프랑스보다 2~3배나 더 많습니다. 중국 역시 외환 보유고가 3조(兆)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불과 100분 거리에서 눈부시게 변하는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선택할 때가 됐습니다. 우선 영'호남이 어떠니 밀양'가덕도가 어떠니 따위의 시답잖은 우물 속 치킨게임부터 끝내야 합니다. 투표의 보답이나 기다리는 의타심도 버려야 합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냉철과 합리로 똘똘 뭉쳐져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스타일로는 표 좀 줬다고 우리 고향에 한턱 크게 쏠 일은 아마도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한턱 쏴 주려 해도 받을 그릇이 준비됐는지, 그리고 왜 100분 거리 바깥의 남들이 우리 고향을 우물 속 시골 땅이라며 입방아 찧는지도 자성(自省)해 봐야 합니다.
부끄럽고 억울하지만 100분 거리 바깥세상의 인식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시각이 비뚤어졌다고 시비 붙고, 욕 대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고칠 것, 바꿀 것, 더 다듬을 것들이 무엇인지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변화와 행동입니다. 물량적 인프라와 하드웨어 쪽 기반은 어차피 취약한 우리 고향입니다. 돌파구는 문화도시의 뿌리를 되캐내는 것입니다. 대구의 1만 명이 넘는 뛰어난 예술인들은 무한한 잠재력을 품은 에너지원입니다.
문화 향유 열정도 서울 다음으로 앞서 있습니다. 대구만 해도 연간 예술 공연 횟수가 500여 회로 부산(200회), 광주(150회), 인천(100회)의 몇 배를 넘고 있습니다. 문화의 시대에는 문화가 정치를 순화시키고 경제를 선도합니다. 아바타 영화 한 편이 3조 원을 벌어들이는 세상입니다. 우리 고향의 부활은 먼저 문화예술에서 그 불씨를 찾아야 합니다. 예술인을 아끼고 메세나 후원을 아끼지 말고, 예술인을 위한 겸손한 문화 행정 지원을 당부합니다. 그런 문화에 의한 순화된 마인드가 번져갈 때 100분 거리 바깥의 존경을 받는 화합과 상생의 고향이 되리라 믿어집니다.
30년 성원 감사드립니다
지난 30년간 매주 미욱한 글들이 많았던 수암 칼럼을 사랑으로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평화와 부처님의 자비 속에 늘 행복하시고, 자랑스러운 우리 고향과 매일신문을 변함없이 키우고 아껴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집필을 끝내며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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