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린 실가지 위에 한 점의 봄 햇살처럼 찾아드는 작은 꽃이 있습니다. 영춘화입니다.
몇 해 전 이맘때, 청도 매전의 ㅈ교수댁에서 옮겨 심은 것입니다. 그의 노모님이 사시던 집 돌담 사이에서 마치 손으로 그린 별 같은 영춘화를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나는 올망졸망 매달린 꽃부리들 앞으로 바짝 몸을 옮겨놓았습니다. 찬 듯 다감한 그 꽃잎은, 오로지 꽃만으로 봄을 맞으러 나선 모양새가 청녀(靑女)의 손길인가 싶기도 하였습니다. 애잔한 눈길을 떼지 못하던 나에게 ㅈ교수가 한 포기 뿌리째 뽑아 준 것인데 나는 그것을 시골 형님 집 뒤뜰에 심어두었지요.
매전의 그 댁 마당은 온갖 풀꽃들로 가득했습니다. 뒷산에 잔설이 녹을 무렵이면 영춘화를 앞세우고 복수초, 할미꽃, 수선화, 꿩다리, 매발톱…. 크고 작은 야생화들이 다투어 꽃을 피웁니다. 사발 그릇을 두어 개 포개 놓은 듯 손바닥만 한 연못가로 보랏빛 창포가 윤기를 드러내는가 하면 소금쟁이며 비단개구리가 몸을 감추기도 하지요.
계절은 언제나 머무를 새가 없습니다. 까무스름한 반시나무 가지에서 연둣빛 새잎이 돋아나고 온 마을이 차츰 샛푸른 감잎으로 뒤덮일 무렵이면 나와 ㅈ교수는 세상사에 이야기 옷을 입히기 시작했지요. 일상적 삶에다 아름다움(미)의 문제를 곁들입니다. 미학적 담론이라고 해둘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한 삶터에서 색다른 미적 센스를 열어나간다는 대전제하에 일상의 미 이야기를 주고받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습니다. 달빛과 별빛, 댓잎 서걱대는 소리와 감잎 향기, 굴뚝 위로 한가로이 솟아오르는 연기와 그 내음…. 우리들의 삶터에서 체감하고 부대끼는 모든 것들은 이야기의 대상이 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즈음 한창 미학 공부에 흥미를 두고 있던 나에게 서양미학을 전공한 ㅈ교수는 마치 수제자라도 만난 듯 자신이 사유한 미학적 논리와 현실세계를 유감없이 토로해 주었습니다. 행정과 미학을 융합하고 실용가치를 찾으려 한 나에게 ㅈ교수는 지적능력과 아울러 더없는 행복감을 확충시켜준 분입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이야기 속에 하루의 해를 묻으면 팔순을 앞둔 그의 노모님이 저녁상을 마련하시곤 했지요. 자식 사랑이 끔찍하시던 자당님, 친정이 삼천포이던 그분은 갯내음이 짭짤하게 밴 말린 가오리찜을 별미로 내놓으시곤 하셨습니다. 숟가락을 든 채 당신의 아들과 벗을 바라보며 행복해하시는 자당님을 곁에 모시고 우리는 이야기 반, 찬 반을 섞어가면서 그야말로 풍성한 밥상을 마칩니다. 아니 숫제 상을 물릴 생각도 없이 잔잔한 이야기상을 계속 차려나갔지요.
집 앞 들길과 강나루를 걸으면서도 우리는 끝없는 대화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감으면서 즐거워했습니다. 대화가 안겨준 행복감이었습니다. 내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던 알 수 없는 감정이 흘러 넌출졌으니까요.
사람마다 행복감이 다르고 그 얻는 방식도 다양하련만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소통이 아닐까 싶어요. 대화라는 물길을 따라 걸림 없이 떠나노라면 자연스러운 정서적 자람과 치유를 맛보게 되지요. 누군가와 사유의 세계를 공유하면서 실컷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내 속에서 나만 알고 가두어 두었던 감정도, 욕심도 증오도 불만도, 그래서 한없이 답답했던 것들까지 스르르 녹아들게 마련입니다. 행복의 길로 들어서는 출발점이기도 하지요. 달라이 라마는 행복을 얻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다 하였습니다. 내밀한 감정 샘을 건드리는 소통을 말하는 듯합니다. 상대를 배려하면서 자기만족을 얻는 비결이지요. 관심의 대상을 이끌어내고 감성을 확충시켜 나가는 이야기는 곧 힐링이자 행복의 길입니다.
가족 간의 대화 시간이 하루 10분을 웃돌지 않는다는 사회 통계를 보면서 갑자기 우울해집니다. 행복으로 들어서는 관문이 닫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질적 풍요 위에 우리가 진실로 갈구하는 행복, 그 첫걸음은 곧 이야기 나눔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요. 산다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입니다. 쉼 없이 걸어야 할 그 길, 혼자선 너무 외롭고 힘겹잖아요. 서로의 가슴을 따뜻하게 다독이고 공명해 주는 이야기 동무가 필요하지요. 진정한 대화는 행복의 일촌입니다.
김정식/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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