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여 년 공백 깨고 원로화가 회고전 참여
# 평생 그린 작품도 정리 스케치만 1만 점 넘어
수채화가 이경희(88) 화백은 대구 미술계의 '전설' 같은 존재였다. 1949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첫해에 '포항부두'를 출품해 특선을 받았고, 이를 심사한 이인성 화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힐 만큼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고, 1964년부터 1991년까지 30여 개국을 다니며 세계 사생 여행을 했다. 수채화에 있어 독보적일 만큼 두드러진 실력을 선보이던 작가는 어느 날 갑자기 붓을 꺾었다. 서양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맏아들 이국봉이 1992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노 화가는 '그림이고 뭐고 아무것도 싫다'면서 평생 곁에 두었던 붓과 물감, 종이를 버렸다. 그 후 20여 년. 최근 이 화백이 붓을 잡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듯하더니, 4월 7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이 개최하는 원로화가 회고전을 수락하고 전시를 연다.
전시를 앞둔 이경희 화백의 자택을 찾았다. 이 화백 부친 시절부터 살아온 오래된 주택이다. 아흔을 앞둔 노 화백은 70, 80년 전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하며 다시금 화가로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나는 지금부터 현역 작가다."
20년간 붓을 놓았던 수채화의 거목 이경희 화백이 다시 붓을 잡았다. 그의 붓끝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날카롭다. 현장을 직접 다니며 스케치하는 것도 여전하다. 오랜만에 붓을 잡아서인지, 식당'병원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스케치한다. 아흔 가까운 나이가 무색할 만큼 붓끝에는 힘이 실렸다.
화가였던 큰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20년간 이 화백은 그림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러던 이 화백이 이제 다시 그림을 그린다.
"올해 1월 2일이 결혼 60주년 기념일이었어요. 제자가 축하 꽃을 사다줘 집안에 꽂아 뒀는데, 꽃을 보니 갑자기 그리고 싶어졌어요. 지인이 마침 화구도 선물해주고. 그래서 꽃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림에 손 놓은 지 20년 만이네요."
지난해부터 그는 평생 자신의 자료들을 하나 둘 꺼내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제자 김영길(전 영진전문대 교수) 씨가 곁에서 이를 돕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이 그림이며,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하셨어요. '이대로 죽으면 이걸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시면서 말이죠." 그동안 손도 대지 않던 아들의 작품들까지 모두 정리 중이다.
어린 시절, 그는 유화를 그리다가 호롱불 기름을 잘못 부어 집에 불이 난 적이 있다. 그 후로 유화 대신 수채화를 선택했다. 수채화도 평범한 길을 걸어오지 않았다. "모든 물을 다 실험해봤어요. 간장물, 빗물, 설탕물, 생수 등 모든 물을 다 실험해봤죠. 물을 다루는 것은 수행이나 매한가지예요."
그래서인지 그는 물 관련 스포츠 역시 수준급이었다. 수영, 스케이트, 스키 등 스포츠에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기도 했었다.
이 화백은 대구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작품뿐만 아니라 어떤 사소한 자료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두었다. 서울에서 열린 2회 개인전 방명록에는 이중섭, 김환기의 친필 사인이 남아 있다. 1980년대부터 스케치를 위해 오페라, 발레 등 공연을 본 공연 티켓까지 모두 모아두었다. 그의 수집품과 작품은 대구 문화의 역사인 셈이다. 그의 자택 거실에는 1947년부터 현장 스케치를 한 스케치북만 해도 446권 1만1천150장이 빼곡히 꽂혀 있다.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김영동 미술평론가는 "이경희는 사실주의적 묘사에 치우치지 않았고 표현의 감각적인 면에서나 소재를 선택하는 뛰어난 개성이 있다"면서 "전통적인 수채화의 현대화를 지향하면서도 항상 심미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는 점에서 이인성을 계승한 작가로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1947년부터 1981년까지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출품한 작품들과 국내외 여행지의 풍경화, 스케치, 수채화, 유화, 도자기 등 60여 점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최근작까지 함께 전시하는 이번 전시는 4월 7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1~3전시실에서 열린다.
그의 거실에는 그리다 만 작품이 놓여 있다. 1월 1일부터 그리고 있는 정물화 '세계의 보물'.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모은 수집품들을 화폭에 옮기고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품에 대해 "언제 완성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노화백은 12일 전시기간 동안 매일 다른 옷을 바꿔 입는다. 인연이 남다른 제자들을 선정해 선물 받는 것. 의상 하나도 개성을 고집한다.
"작가는 남 그림 닮으면 안 돼요. 미술엔 교본이 없습니다. 예술가는 까다로워야 합니다. 평범해서는 안 되지요. 유행을 만드는 게 창조입니다."
그는 오늘도 그림을 그린다. 병원에서 링거 주사를 맞으면서도 제자에게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해서 누워서 바라본 병원의 풍경을 스케치했다. 최근에는 정월대보름의 달불놀이, 도동 측백수림, 신천 둔치 등을 직접 찾아가 스케치했다.
"앞으로 계획이요? 나도 모르죠. 그림은 억지로 못 그려요. 그리고 싶은 시간이 많길 바랄 뿐이죠."053)606-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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