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읍내에는 남대천 물길을 지나 골목길을 돌아보는 둘레길이 있다. 의성종합운동장을 출발해 문소루를 지나 남대천과 남원들, 읍내 거리를 거쳐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7.5㎞ 코스다. 곳곳에 표지판이 설치돼 있고, 오르막이 거의 없어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천 년 고찰인 고운사와 600여 년을 흘러온 사촌마을도 버스를 이용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골목 따라 걷는 의성읍 둘레길
의성종합운동장 입구에 설치된 안내표지판에서 큰길을 따라 내려오다 의성 119안전센터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한적한 길이 나타난다. 하천변을 따라 걷다가 의성 제2교에 이르면 구봉산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문소루(聞韶樓)를 만난다. 문소란 의성의 신라 때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진주 촉석루와 밀양 영남루, 안동 영호루 등과 함께 '영남 4대 누'로 불리기도 했다. 6'25전쟁 당시 불에 타 1983년 지금 자리에 복원했다. 문소루에 오르면 남대천 물줄기를 따라 터를 잡은 의성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문소루에서 내려와 남대천 물길을 따라 걸었다. 도로에 의해 둘레길이 끊어지는 지점이지만 표지판을 쉽게 찾기 힘들어 한참 두리번거렸다. 남대천변에는 초록빛이 스며들기 시작한 구봉산 봉우리들이 길게 이어진다. 조금 더 걷다 보면 석탄가루가 산처럼 쌓인 연탄공장이 나타난다. 의성에 있던 연탄공장 3곳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다. 연탄가루 날리는 공장 뒤쪽에는 장애인연합회 사무실이 외롭게 서 있었다.
남대천 둑길에는 자전거도로가 조성돼 있고, 곳곳에 의성의 역사와 문화, 특산물, 자연환경 등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너른 잔디밭의 구봉공원을 지나 남천교에서 남원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들판은 막 싹이 올라온 어린 마늘 줄기로 온통 초록빛이다. 의성중학교부터는 표지판을 따라가는 대신 읍내 골목길을 둘러보는 게 낫다. 옛 장터 풍경이 남아있는 의성전통시장이 있고, 골목 곳곳에는 2층짜리 일제 가옥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의성향교도 가깝다. 의성향교에는 대성전과 명륜당, 광풍루 등 조선 중기에 지은 건물들이 보존돼 있다. 향교 맞은편에는 국내 유일의 성냥공장인 성광성냥공업사가 있다. 70년 된 양조장인 의성탁주 합동제조장도 들러볼 만하다. 둘레길 코스로 돌아오면 충효사가 눈에 들어온다.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정만록'을 지은 이탁영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곳이다. 충효사에서 태평양지아파트를 지나 500m 정도 걸으면 출발점이다.
◆고운사에는 시래기가 익는다
의성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천년고찰 고운사다. 신라 신문왕(681년)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고, 최치원이 가운루와 우화루를 지어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식량 비축과 승병의 뒷바라지를 한 곳이다.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60여 개의 말사를 관장하는 유서깊은 대사찰이다.
의성읍에서 고운사까지는 하루 4차례 버스가 오간다. 오전 10시 50분 의성버스터미널에서 고운사행 버스를 탔다. 요금은 2천900원. 고운사까지는 35분 정도 걸린다. 고운사 주차장 앞 일주문을 통과하면 숲길이 펼쳐진다. 부드러운 흙길을 밟으며 느긋하게 걷다 보면 머릿속은 개운하고 발바닥은 가벼워진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가운루다. 높이 13m나 되는 긴 기둥이 돌로 쌓은 계곡바닥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다. 약사전에는 입을 꾹 다문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246호)를 볼 수 있다. 나한전은 원래 대웅보전이었지만 1992년 대웅보전이 신축되면서 현재 자리로 옮겼다. 나한전 앞에는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있다.
돌아 나오는데 가운루 안에 특이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누각 아래 뭔가 가득 널린 것이 자세히 보니 무청 시래기다. 지난가을 거둬 말린 무청이 천 년 고찰 안에서 수분을 날리며 맛을 더해가고 있다.
오후 2시 50분 버스를 타고 15분가량 달려 점곡면 사촌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가로숲(천연기념물 제405호)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길이 600m, 너비 40m로 마을 서편을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개천변을 따라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300여 년 이상 된 노거수가 뒤섞여 있다.
마을의 역사는 600년 이상을 헤아린다.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은 만취당이다. 만취당 옆에는 500년 된 향나무가 서 있다. 만년송이라는데 류성룡의 외할아버지인 송은 김광수(1468~1563)가 심었다. 양진당과 후송재, 후산정사 등 오래된 한옥도 많다. 하지만 양옥 형태로 개보수한 집들도 적지 않고, 허물어진 채 방치된 한옥들도 꽤 눈에 띈다. 사촌마을에서 의성으로 가는 버스는 30~40분 간격으로 오간다. 단촌을 경유하는 버스는 요금이 2천400원이지만 일직'구암을 경유하면 1천700원이다. 거리 때문이다. 의성까지는 20분 정도 걸린다.
◆"행님, 치우소! 미쳤니껴?"
의성에서 안동시 길안면을 거쳐 청송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마을 전체가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는 점곡면 윤암1리와 2리에 들르기로 했다. 마을로 가려면 '의성-점곡-옥산' 버스 중에서 실업을 경유하는 버스를 타야 한다. 하루 6차례 운행한다.
윤암1리 32가구와 윤암2리 30여 가구는 '청암공동체'를 구성하고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다. 이 마을에서 무농약 유기농 농사를 짓기 시작한 건 1991년. 벌써 22년이 넘었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무농약 농사를 시작한 건 이재국(60) 씨다. 친환경농법에 대한 인식이 박하던 시절, 이웃들의 따가운 시선도 많이 받았다. 수확량이 줄고 품질은 떨어졌고, 판로도 찾기 힘들었다. 친환경농법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도 부족했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려고 쌀겨와 깻묵을 발효시켜서 거름으로 썼어요. 그런데 이게 냄새가 심한데다 발효를 제대로 시키지 않으면 작물이 죽어나가요. 정말 고생을 많이 했죠."
벼농사는 오리농법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오리 배설물을 치우기 힘들었고, 오리가 풀을 뜯으려고 논바닥을 마구 파헤치는 통에 마을 개천이 흙탕물이 되기 일쑤였다. 잡초를 없애려고 모를 심기 전에 쌀겨를 뿌렸지만 썩는 냄새 때문에 동네에 난리가 났다. 결국 착안한 게 우렁이 농법이었다. 토종 우렁이는 풀을 먹지 않기 때문에 외래종인 아프리카 산을 쓴다. 아프리카 우렁이는 한국에서 겨울을 나지 못해 모두 얼어 죽고 거름이 된다. 생태계가 회복되면서 투구 새우가 살아나고, 봄철 산란기를 맞은 새우들이 흙탕물을 내면서 잡초도 덜 났다. 덕분에 우렁이 사용량도 3분의 2 정도로 줄었다. 살아난 환경이 농부를 돕고 있는 셈이다.
1990년대 후반에 들면서 이웃들도 하나 둘씩 친환경 농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7가구였던 유기농 농가가 15가구로 늘었다. 생산한 농작물을 모두 생활협동조합인 한살림에 납품하면서 안정적인 판로가 확보된 덕분이다. 공동체 회장을 맡고 있는 이상묵(66) 씨는 "처음에는 동생도 '행님, 치우소. 미쳤니껴?' 그랬어요. 지금은 함께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죠. 그때 얘기를 하면 슬쩍 자리를 피해요"라며 웃었다.
◆안정적인 판로와 마을 전체 참여가 관건
농약이나 비료의 힘을 빌리지 않는 대신 품은 곱절로 드는 게 친환경 농사다. 생산량도 일반 경작지에 비해 60% 수준에 불과하고, 상품성도 떨어진다. 그러나 농산물 가격의 등락폭에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가격이 유지되는 게 장점이다. 현재 윤암리에서는 논 17만㎡와 밭 21만4천㎡, 사과 등 과수 29만㎡ 등을 짓고 있다. 연간 유기농 의성 한지 마늘을 60~70t을 생산, 연간 매출액이 25억~30억원에 이른다.
"가장 힘든 일은 풀을 매는 거예요. 농약을 치면 5시간이면 끝날 일을 사흘 이상 해야 하니까. '약 한 번만 치면 될 텐데, 비료 조금만 주면 될 텐데…' 유혹이 엄청나죠." 친환경 농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을 공동체 모두의 참여다. 한 집이라도 농약을 치면 마을 전체 경작지로 퍼지기 때문이다.
청암공동체는 2008년 도농교류체험관을 짓고 매년 여름과 겨울에 생명학교를 열고 있다. 매년 40~50명이 마을을 방문해 농사 체험을 한다. 남은 고민은 친환경농법을 이어갈 후계자가 없는 점이다. "젊은 귀농인이라도 들어와서 농사를 이어받아 주면 좋은데 그마저도 드물어요. 그게 마을 모두의 고민이에요."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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