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별별 세상 별난 인생] 아날로그 음반 소리 마니아 그래픽 디자이너 황의룡 씨

소장 LP판 7000여장, 60년 된 스피커로 들어

대구 수성구 만촌동 한 건물 지하 사무실. LP(Long Playing)판 위로 카트리지(바늘)가 내려앉자 둔탁한 시작 소리와 함께 아날로그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카트리지는 구불구불한 LP판의 골을 지나면서 만난 먼지까지 소리로 전달한다. LP판이 매끄럽지 않은 이유다. '지직, 지직~' 하며 추억의 LP판이 돌아간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이미자 목소리의 '황성옛터'.

눈을 지그시 감고 이미자의 호소력 짙은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은 그래픽사진 다자이너 황의룡(53) 씨. "음반수집가는 그런 것 같아요. 아무리 음반문화가 발달해도 옛날 것들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원곡, 원곡' 하게 되나 봐요."

LP판을 다루는 그의 손놀림이 능숙하다. 수십 년 넘은 LP판임에도 끊김 없이 고운 소리를 낸다. CD의 음질과는 다른 소리의 깊이감이 더해지는 듯하다. LP가 돌아가면서 지직대는 잡음도 음악과 섞이니 그 자체로 멋스럽다.

"LP 음악은 인간의 귀에 가장 적합한 소리를 들려줄 뿐 아니라 자연의 소리에 가까워 들을수록 빠져듭니다. 음악을 내려받아 듣고 지워 버리면서 음악이 인스턴트화돼 버립니다. 그에 비해 LP판은 음악을 소유한다는 느낌을 주지요. CD나 MP3에선 느낄 수 없는 정이 느껴지고 사람 냄새가 납니다."

느리고 불편한 LP가 요즘 세태를 거스르는 측면이 있다고 하자 황 씨는 "빠르고 편리한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정성과 노력을 들여 듣는 LP 음악은 소중하게 다가온다. 음악뿐 아니라 따뜻한 추억과 역사를 함께 나누는 순간이다"고 했다.

황 씨는 이렇게 인간미가 느껴지고 아날로그적인 매력이 판을 닦고 턴테이블에 올려놓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음에도 LP판을 찾게 되는 이유라고 말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LP판은 대략 6천~7천 장. 클래식이 70%를 차지하고 대중가요가 20%, 팝송과 재즈 등 기타 장르가 10%를 차지하고 있다. 황 씨는 클래식 장르 가운데 관현악을 좋아한다. 특히 교향곡을 즐겨 듣는다. 종교가 없지만 종교음악도 즐긴다. 이와 함께 SP판도 500여 장. CD도 1천여 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CD는 거의 듣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사무실엔 장롱만한 스피커 여러 대가 사무실을 채우고 있다. 스피커 앞과 옆에는 몇 개의 앰프와 턴테이블이 놓여 있다. 마치 음악 사무실 같다. 본업인 사진편집을 하는 컴퓨터는 사무실 한구석에 놓여 있다. 마치 전축 전시장 같다. 모두 값이 나가는 오래되고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행복하죠. 혼자서 들어도 좋고 같이 들어도 좋아요." 그래서 그의 사무실엔 음악을 좋아하는 지인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최고의 앰프와 스피커가 있기 때문이다. 황 씨가 소장하고 있는 스피커는 모두 10여 세트. 대부분 1940, 50년대에 만들어진 독일 제품이다. 특히 황 씨가 애지중지하는 스피커는 1950년대 독일의 지멘스사에서 만든 극장용 메인 스피커. 극장용인 만큼 크기가 작은 장롱만 하다. 그는 이 스피커를 살 때가 제일 설레고 기뻤다고 했다.

"2000년 초에 그 스피커를 봤는데, 소리에 필이 꽂혔어요. 베토벤이 살아 돌아올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꼭 사고 싶었죠. 한참 기다렸어요."

3년 전 스피커를 판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달려갔다. "정말 기뻤습니다. 경기도 양평에서 트럭에 싣고 오는데 얼마나 기쁘던지."

또 하나의 스피커는 1940년대 독일에서 생산한 오이로다인 스피커. 이 역시 극장용 스피커다. 국내에서 흔히 유러딘이라고 부르는 오이로다인은 독일, 아니 한때는 유럽 전역에서 최고의 극장용 스피커로 각광받았던 스피커다. 그러나 이 스피커는 한쪽이 없다. 그래서 어딘가 있을 한쪽을 찾고 있다고 한다.

턴테이블과 앰프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음향기기는 저마다의 음질을 갖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곡을 제대로 발현하는 기기가 있는가 하면 오케스트라의 장중함을 잘 표현하는 기기는 따로 있죠. 같은 곡도 음향기기를 바꿔 들으면 맛이 달라집니다."

황 씨에게 스피커 값을 묻자 "부르는 게 값"이라고 했다. 너무 귀해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란 것. 그는 독일 전축을 좋아한다. 취향에 맞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사운드는 넓은 땅덩어리처럼 장쾌, 통쾌하고 브리티시 사운드는 온화하고 풍요로운 귀족 소리인 데 비해 독일 사운드는 소름이 끼칠 듯한 명징함과 섬세함이 있어요. 표면의 막을 한 겹 벗겨낸 소리라고나 할까요. 듣다 보면 그 예민함에 지쳐 나자빠집니다."

음악 이야기는 어릴 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어요. 공부하고 바쁘게 열심히 살았죠. 어느 날 사무실을 리모델링하다가 문득 사무실이 너무 삭막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뒤로 음반과 기계를 조금씩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지요."

황 씨는 새로운 음악적 미각을 즐기기 위해 요즘도 틈날 때마다 서울 황학동 풍물거리를 뒤져 음반과 음향기기를 수집한다. 지인이나 음반 판매장으로부터 외국에서 새로운 음반이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으면 모든 일 젖혀두고 달려간다.

"제대로 된 기계를 통해 음악을 들으면 수십, 수백 년 전 그 음악을 만든 음악가를 불러낼 수 있어요. 만나서 대화하는 거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신나는 일이에요."

사진·박노익 선임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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