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2부-근대의료의 도입 <5>대구의 근대 의학 교육(상)

의사시험 독학생 위한 강습소, 경북대 의과대의 새싹

1910년대 대구 자혜의원의 모습. 1907년 문을 연 대구 동인의원을 매입한 것이기 때문에 모습은 동인의원 때와 같았다. 당시 병원 부지는 현재 대구시청 건너편과 교동시장 사이의 한 블록을 차지할 정도로 넓었다.
1910년대 대구 자혜의원의 모습. 1907년 문을 연 대구 동인의원을 매입한 것이기 때문에 모습은 동인의원 때와 같았다. 당시 병원 부지는 현재 대구시청 건너편과 교동시장 사이의 한 블록을 차지할 정도로 넓었다.

평양 동인의원이 1906년 12월 1일에 문을 연 데 비해 대구 동인의원은 조금 늦은 1907년 2월 10일 개원했다. 하지만 의학교육의 시작은 조금 더 빨랐다. 당시 대구 동인의원 부원장이던 후지나와 분준은 평양보다 한 달쯤 이른 1907년 9월부터 의학교육을 시작했다. 다만 대구 동인의원에 부속된 의학교육 기관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평양의 사례에 비춰볼 때 3년제 의학강습소 형태이며, 이름은 '공립대구 동인의원 부속 의학교'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구 동인의원 부속 의학교의 의학교육

개교 당시 제1기생으로 한국인 6명을 선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인의원의 의사들이 '여가의 일'로 여길 정도로 본격적인 의학교육은 아니었고, 매우 작은 일종의 서당식 의학교였다. 보통학과와 전문 기초의학을 가르쳤는데, 정해진 기간에 의학 교육을 마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일본어와 의술을 어느 정도 익힌 학생들은 다른 의원에 고용되거나 다른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의사 자격 규정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의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의학교를 마칠 필요가 없었다. 1908년 5월 일본어를 할 수 있는 한국인 10명이 제2기생으로 선발됐다.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가 대구 동인의원을 매입해 관립 대구 자혜의원으로 바꾸면서 부속 의학교도 '대구 자혜의원 의육과(醫育科)'로 소속이 옮겨졌다. 당시 남아있던 학생은 5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4월 의학교육 일원화 방침에 따라 경성에 있는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만을 관립 의학교육기관으로 지정했다. 대구 동인의원 부속 의학교 학생들은 이때 희망에 따라 이곳으로 전학갔는데, 재학생 2명만 장학생으로 전학 간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다만 대구 동인의원 부원장이던 후지나와는 재학생 전원이 전학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결국 대구 동인의원 부속 의학교는 졸업생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채 문을 닫고 말았다.

◆의사도 부족하고, 양성기관도 부족한 실정

조선총독부는 1913년 11월 의사 인력에 관한 규칙을 공포했다. 의사가 되려면 조선총독이 지정한 의과대학이나 관'공'사립 의학교를 졸업하거나 조선총독이 정하는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이 때문에 이전까지 비교적 자유롭게 의원을 열 수 있었던 대한의원(1907년 3월 개원, 19010년 9월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 부속 의학교 출신자를 비롯한 여러 의학교육기관 수료자들의 개원이 어려워져 의사 부족 현상이 심해졌다.

대한제국 정부가 설립한 최초의 근대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는 1899년 9월 개교했다. 3년 뒤인 1902년 7월 역사상 첫 한국인 근대 의사 19명이 졸업했다. 이 의학교는 1907년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교로 바뀐다.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는 1905년 문을 열었고, 1908년 6월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됐다.

의학교를 거치지 않고 의사가 되려면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쉽지 않았다. 1914~19년까지 10차례 의사시험이 있었는데 합격자는 모두 90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한국인은 절반도 안 되는 43명에 그쳤다.

의료인력, 특히 한국인 의사 부족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1918년 말 경상북도 의료인력의 실태를 보면, 대구를 포함한 경상도 전체 의료기관은 15곳에 불과하고, 근대 의학을 배운 의사는 68명(한국인은 12명)에 불과했다.

상황은 이러했지만 1916년에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가 승격된 경성의학전문학교와 1917년에 승격한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외에 다른 의학교육기관의 설립은 당장 실현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경북대 의과대학의 역사가 시작

한국인 의사가 되려면 조선총독이 정하는 의사시험에 합격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 이른바 독학으로 의사시험을 준비하려는 사람이 늘었는데, 특히 동인의원 당시 의학교가 있었던 대구와 평양에서 그런 경향이 강했다.

이 때문에 평양에서 의사시험을 준비하는 독학생을 위한 2년제 야간 사립 의학강습회가 들어선 것은 대구에 하나의 자극제가 됐다. 1923년 7월 대구자혜의원 의관이던 요시다는 경상도지사에게 '사립 대구의학강습소' 설립을 청원해 7월 23일에 인가를 받았고, 대구자혜의원 의관과 의원, 대구중학교 교사 등 14명을 강사로 위촉해 9월 2일 개교식을 열었다. 비록 대구자혜의원 건물 일부를 빌려 쓰는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바로 여기서부터 경북대 의과대학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사립 대구의학강습소'의 강습기간 전'후기 1년 반씩 모두 3년이었다. 정원은 전'후기 각 50명씩 100명으로 꽤 많았다. 당시 평양의 경우 정원이 60명이었다. 입학 자격은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자로 ▷신체가 건장하고 지조가 건실하여 품행이 단정한 사람으로 ▷중학교 또는 수업연한이 3년 이상인 중등 정도의 관'공립학교 졸업자와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자로 ▷국어(일본어), 산술, 물리, 화학 등의 과목을 시험하는 입학시험에 합격한 사람으로 돼 있었다.

야간제인 탓에 수업시간은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3시간이었고, 토요일 수업은 2시간이었다. 평양의학강습소가 의사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곳이었는데 비해 대구의학강습소는 본격적인 의학교육기관에 가까웠다.

◆도립 대구의학강습소로 변신

사립으로 시작한 대구의학강습소는 개교 후 1년이 채 안 된 1924년 4월 1일 '도립 대구의학강습소'로 바뀌었다. 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정원이 100명에서 150명으로 늘었고, 강습기간은 전기 2년과 후기 1년으로 정했다.

강습소 소장에는 대구자혜의원 원장 가미무라가 임명됐으며, 강사로는 대구자혜의원 의관들과 대구중학교 교사가 위촉됐다. 수업시간은 종전처럼 오후 4~7시 수업을 하고, 토요일은 2시간만 수업을 받는 야간제 강습소였다.

1925년 관립 대구자혜의원이 도립 대구의원으로 바뀌면서 강습소의 소속도 그렇게 바뀌었다. 이듬해인 1926년 도립 의학강습소 규정이 일부 바뀌면서 다시 한 번 변화를 겪게 된다. ▷정원이 150명에서 200명으로 늘었고 ▷3년이던 강습기간을 4년으로 연장됐으며, 입학 학력제한도 더욱 까다로워졌다. 입학시험 과목도 늘어났다. 국어(일본어), 산술(수학), 물리, 화학에서 영어나 독일어 등 외국어 시험을 덧붙여 출제하게 했다. 입학자격과 시험은 이미 전문학교 수순과 같아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의학전문학교로 바뀌는 것은 지역 유지와 학생들의 꾸준한 청원이 잇따른 뒤인 1933년 3월에야 가능해졌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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