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어느 지역에서는 갓 나온 보리순을 뜯어 무쳐 먹거나 밀가루에 섞어 부침개를 부쳐 먹는다. 지금 세대에게는 별미로 비춰질 수 있지만 끼니 걱정을 달고 살았던 어르신들에게는 아픈 추억을 간직한 음식이다.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서 무엇 하나 수확할 것이 없었던 춘궁기는 옛날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자고 나면 입에 풀칠할 일이 가장 큰 일이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입에 넣을 것이 없었던 시절, 보리순을 뜯어 무쳐 먹는 맛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
먹고 살만해진 요즘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암과 같은 질병과 전쟁 등을 꼽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공포와 불안을 주는 존재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고령화'라는 생각이 든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의학 발달로 인한 수명 연장은 축복으로 받아 들여졌다. 하지만 지금은 축복을 너머 재앙처럼 다가오고 있다. 100세 시대가 열렸지만 정부 또는 개인의 대비는 많이 부족하다.
최근 서울국제시니어엑스포에 참가한 50대를 대상으로 노후 준비를 물은 결과 45%에 달하는 사람들이 노후준비가 부족하다고 답했다. 그리고 은퇴 후 희망하는 생활자금으로는 월 평균 285만원을 꼽았다. 반면 이들이 갖고 있는 금융 자산은 평균 1억원에 불과했다. 게다가 1억원의 금융 자산 대부분은 노후를 위해 적립된 것이 아니라 생활자금이나 자녀 뒷바라지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때 은퇴는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여유와 휴식, 그리고 노년에 맞는 안락한 선물 같은 것이었다. 40여 년 열심히 일한 후 맞은 은퇴는 분명 그래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은퇴를 하고도 최소 2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는 고령화 시대가 열리다 보니 철저한 노후 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실버 푸어'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 사회를 맞은 일본에서 오래전 고독사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에서도 궁핍한 노년을 살다 외로운 죽음을 맞는 노인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은퇴 후를 준비하느냐, 준비하지 않느냐의 문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필수를 너머 필사적인 과정으로 진화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준비해야 할 것 중 가장 길면서도 무거운 것이 은퇴준비다. 그렇다 보니 태어나면서부터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차분하고 철저하게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노년은 고통스럽다. 극단적으로 끼니를 걱정하며 20~30년을 견뎌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은퇴 보릿고개를 넘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자 삶의 질을 결정하는 일이다. 은퇴 후 30년을 인생의 황금기로 보낼지, 가장 혹독한 춘궁기로 보낼지 여부는 노후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설계에 달려 있다. 지금 당장 종이와 펜을 꺼내 노년의 그림을 그려 봐야 할 일이다.
배영아 프라임 에셋 배영아(아리언지사 국제공인 재무설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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