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으로부터 사후 장기기증을 하기로 서약했다는 말을 듣고 감동하였다. 나도 오래전부터 생각은 있었지만, 선뜻 내키지 않아서 망설였다. 한 사람의 장기기증으로 아홉 명을 살릴 수 있다니 대단한 일임은 틀림없다. 나의 작은 베풂이 소중한 이웃을 살릴 수 있다면 그보다 값진 일이 있을까.
일기장을 뒤적이다 '나눔'이란 글에 시선이 갔다. 생활 전선에 뛰어들고부터는 마음이 팍팍해졌다는 반성의 글이었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눈시울이 먼저 뜨거웠었다. 그랬던 가슴이 왜 이리 냉랭해진 것일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와 디지털이 주는 편리함이 인정을 메마르게 하는 것 같다. 불우이웃돕기도 저금통을 털고, 봉투를 직접 가져가기보다는 전화기 단추 하나로 자동으로 이체되는 시대다. 기계에 마음 맡겨두고 마치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안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혹자는 잠에서 깨어 스마트폰을 바라볼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한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기계가 남편이고, 아내이고, 친구이고, 이웃이다. 모든 것이 가상공간에서 해결된다. 편리함이 사람의 온기마저 빼앗아 간다. 기계에서는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다.
이웃이 겪는 행(幸)이든, 불행이든 함께할 수 있는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신문이나 공중파 방송으로 부고를 듣는다. 씁쓸한 현실이다. 성경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나만 사랑하기에 급급해서 이웃은 돌아볼 여지가 없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세상을 살면서 잊고 살았던 일 중의 하나인 것 같다.
"한 마리 파리를 죽이는데 야단법석을 떨지 말고 지금 당신이 이웃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라"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이 단단한 심장을 허문다. 우리는 무관심의 바다에서 산다. 옆집에 누가 살든 관심이 없다. 무관심이 곧 이웃을 죽이는 행위가 아닐까.
생명이 있는 것은 '관심'을 먹고 자란다. 관심은 '눈길'이다. '눈길'은 '배려'와 '사랑'을 낳는다. 아이들도 관심이 없으면 덩치만 커지지 속으로 알이 차지 않는다.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에게 배고픔보다 절실한 것은 따뜻한 관심일는지 모른다. 녹록하지 않은 세상에 관심을 주는 누군가로 용기를 얻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면 이보다 큰 도움은 없을 것이다.
내 작은 관심이 이웃을 살리는 큰 불씨가 될 것이다. 이웃을 살리기 위해 관심이라는 렌즈를 착용했으면 좋을 것 같다.
김근혜<수필가·대구행복의 전화 소장 ksn15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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