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주는 일에 대하여

며칠 전, 오랜만에 빵집을 들렀다. 2층에 카페를 겸하고 있는데다 1층 빵집도 밖에서는 여느 빵집처럼 보이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아는 사람만 주로 찾는다는 말이다. 오후 3시쯤, 좁은 빵집 안에 손님은 나 혼자였다. 좀 느긋하게 빵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궁시렁궁시렁 쉼표 없는 노래처럼 뭐라 뭐라 하는 말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하이고, 배고파라, 빵이 마아아이(많이) 있네, 아이고 우리가 배가 고파가(고파서) 안 카나(안 그렇나), 빵 좀 주마(주면) 좋겠구만, 하이고 빵 좀 주이소, 배가 진짜 너무 고파가 안 카나…."

내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보고 싶었지만, 애써 보지 않으려 했다. 빵을 고르던 행위가 부자연스럽게 단절되지 않도록 최대한 애썼다, 빵집 점원 아가씨가 어떻게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서. 그 사이에도 타령 같은 말소리는 계속되었다. 점원 아가씨도 어쩔 줄 몰라 나처럼 최대한 하던 일을 연결 동작으로 하려 애쓰고 있었다.

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호기심과 마음의 불편감을 이기지 못하여 나는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 나무 작대기를 지팡이 삼아 짚고 들고 계셨다. 바랑 수준의 작은 가방을 등에 메신, 키가 작고 좀 몸집이 있으신, 그러나 '멀쩡한' 분들이셨다. 멀쩡한! 등을 돌려 그분들을 보기 직전까지, 나는 그분들의 행색이 남루하리라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예상보다 깨끗한 차림과 영양 상태(물론 고혈압, 당뇨, 관절염 등은 그 연세와 몸매로 보아 당연히 있겠다 생각했지만, 영양 상태는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를 근거로 '멀쩡한 분들이 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하마터면 점원 아가씨에게 "남는 빵 좀 있으면 드리지 그래요?"라고 말할 뻔하였다. '남는 빵'이라고 말하려던 나의 의도는 기실 '팔지는 못하지만 먹을 수는 있는 빵'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돌리던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그분들께 빵을 드릴 것이라는 것을. 그분들을 위한 빵을 골라 같이 계산하고 나오는 길에 황급히 그분들에게 드렸다. "하이고, 고마바라(고마워라), 이쁘기도 하네."

왜 나는 빵집에서도, 그리고 이후로도 한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빵을 달라는 배고픈 분들에게 빵을 드렸을 뿐이고, 선의를 베풀었는데 말이다.

소위 말하는 '좋은 일'한다는 비영리법인의 이사로 3년을 보내며, 도움을 주는 것, 선의의 위험성, 후원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시간이 갈수록 마음에 더 굳세게 새기는 시가 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에 나오는 '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시이다. 그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대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주리라. 그러나 오직 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리라.'/

과수원의 나무들, 목장의 가축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 준다. 주지 않고 움켜쥐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기에./(중략)

또한 받을 줄 아는 저 용기와 자신감, 아니 그보다도 받아 주는 저 자비심 외에 무슨 자격이 더 필요한가./

그런데 그대는 어떠한가. 남의 가슴을 찢고 자존심을 발가벗겨서, 그리하여 바닥에 떨어진 그들의 가치와 온통 발가벗겨진 그들의 자존심을 구경하는 그대는./

무엇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줄 자격이 있는가, 주는 심부름꾼이 될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하라."

빵(도움)을 줄까 말까 갈등하던 순간, 다행히도 나는 이 시를 떠올렸다. '멀쩡한'과 '남는 빵'이라는 말로써, 받을 자격 여부를 내가 판단했음을 깨달았고, 드리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이후로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은, 이 개인적 경험과 사회와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사려 과다로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와 이 시를 다시 찾아 읽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김성아/사단법인 더나은세상을위한 공감 이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