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예상치 못한 순간 들이닥치는 것,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왜 하필 나야? 다른 사람도 많은데. 겨우 마흔두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죽어야 한다니." 동준 씨는 한 번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참 잘 받아들였다.
나 또한 암을 이기지도 못하고 남들보다 일찍 죽음이 찾아온 동준 씨를 한 번도 '인생의 실패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가 되는 것이 잘못 산 인생의 결과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일찍 찾아온 죽음을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낀다. 3살짜리의 아기 엄마가 말기 위암이었다. 이 젊은 여인의 친정어머니는 그동안 참고 참고 또 참았다. 딸이 임종하게 되자 "사위하고 시댁 식구가 저 아이 신경을 너무 많이 쓰게 해서 이렇게 된 거야"라고 소리치고야 말았다. 휴직하고 밤낮으로 아내를 돌보던 사위의 얼굴이 몹시 무거워 보였다.
평소 바가지 잘 긁는 부인이 병이라도 나면 철없는 남편은 "당신은 다 좋은데 그 성질 때문에 암에 걸렸어"라고 말하기도 했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의학 상식을 들먹이며 술, 담배, 고기 때문이라며 암 환자를 몰아댄다.
이렇게 건강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환자의 가슴에 대못을 쾅쾅 박고 있다. 그것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만 꼬집어서 깊은 병의 원인을 말하면 곤란하다. 더군다나 참혹한 현실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면 서로가 불편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옷장을 정리할 때 사용하는 진공 압축 팩에 짧게 남은 환자의 인생을 비교한다. 철이 지난 두꺼운 겨울옷도, 다섯 채의 두꺼운 솜이불도 순식간에 얇고 납작하게 된다. 옷과 이불의 부피는 5분의 1 정도로 싹 줄어들지만, 무게는 그대로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내가 돌보는 환자도 진공 팩처럼 시간을 압축해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리털 외투가 압축되면 모양이나 볼품은 없어지지만 그래도 외투는 외투이다. 진공 팩으로 압축돼도 두툼한 겨울옷은 고스란히 옷장에 다 들어 있는 것처럼 인생을 압축해서 사는 말기암 환자도 평균수명 이상으로 장수하는 사람과 같은 인생의 깊이와 무게를 가지고 있다. 경쟁이 끝을 모르고 치열한 세상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도 남들보다 많아야 성공한 인생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압축된 오리털 외투처럼 쭈글쭈글 볼품없는 나의 환자들은 참 훌륭했다.
나는 세상이라는 무대 뒤편에서 더 이상은 주목받지 못하고 희미하게 꺼져가는 생명에게서 그 누구보다 당당한 성숙된 인간미를 보았다.(주: 기욤 뮈소의 소설 '구해줘'에서 참고)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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