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고인 연못

'먹구름이 몰려온다. 빗방울도 떨어진다. 등 뒤로 흘러내린 물이 속옷까지 적셔도, 소나기를 피하랴. 천둥인들 무서우랴. 겁쟁이 강아지는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가자, 천릿길. 굽이 굽이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김민기의 '천릿길' 중에서)

티격태격 거리는 아이들에게 예쁜 선생님이 일러주신다, "노래를 함께 부르는 것은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야." 소나기 쏟아지고 천둥이 치더라도, 함께 손잡고 노래하면 겁나지 않아. 흙먼지 덮어쓰고 마시더라도, 우리 땅에 다 같이 웃으면서 나아 갈 수 있다고.

'작은 연못'(2009)은 연못 안에서 벌어진 거창한 전쟁영화가 아니다. 연못에서 바깥으로 그냥 끌려나온 작은 물고기들이 마냥 파닥거리는 혹은 바동거렸던, 어처구니없는 재난영화다. 6'25전쟁이 터지고 한 달 후인 여름날 외진 산골마을. 느닷없이 집을 비우라니 비웠다. 다짜고짜 산에서 내려가라니 내려갈 수밖에는. 남쪽으로 피란을 가는 '도라꾸'(트럭)를 태워준다기에 무작정 길을 나섰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라며 막무가내로 등을 떠밀었다가, 한 발자국도 꼼짝 말라며 앞길을 막고서는 덮어놓고 날벼락을 퍼붓는다. 사흘 밤낮을 묻지도 않고, 물을 틈도 주지 않고 포탄이 날아들고 마구잡이로 총알이 쏟아진다.

도대체 왜 쏘는지를 알아야 애걸하든지 복걸하며 엎어지지. 어느 누가 쏘라고 시켰는지, 아니 당장 누가 쏘고 있는지 짐작이라도 가야 하소연이든 원망이든 해볼 텐데…. 영문도 모르는 채 피눈물을 쏟아내고, 하나하나씩 무릎이 꺾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반딧불이 하나 춤을 춘다. 문득 끊겼던 노래가 이어지고, 꿈결처럼 박수가 쏟아지며 웃음소리가 우쭐우쭐 물결 친다. 영문도 모르고 죽어가기에는, 죽어서 마냥 헤어지기에는 너무 환한 날이다. 지난날 엄연한 현장이라고 믿기에도, 한바탕 악몽이라고 지나치기에도 자꾸만 아픈 날의 기억이다.

'해는 서산에 지고 저녁 산은 고요한데, 산허리로 무당벌레 하나 휘익 지나간 후에, 검은 물만 고인 채, 한없는 세월 속을 말없이 몸짓으로 헤매다 수많은 계절을 맞죠.'(김민기의 '작은 연못' 중에서)

총알은 눈이 없고, 총부리는 입이 없다. 쏘라고 부추긴 자는 수없는 계절이 바뀌어, 이제는 기억조차 없단다. 아무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날들을, 이제 그만 용서하고 손 모아 노래하잔다. 언제까지 어두운 어제에 발목 잡혀, 저 빛나는 내일을 그르칠 수 있냐고, 또 다그친다. 질끈 눈감고 내달리면, 고여 있는 검붉은 고름들이 절로 뽀얀 살이 되는 꿈이나 꾸라는 건가? 우선은 무엇을 용서하고, 도대체 누구와 화해하라는 것인가?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란다.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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