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달아놓으나마나' 차량용 블랙박스

시중 유통제품 상당수 저질…일부제품 번호판 식별 못해, 불만 신고 34%

박모(72'여'대구 수성구 황금동) 씨는 지난달 40만원을 들여 장착한 전'후방 자동차 영상 사고기록장치(차량용 블랙박스)만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박 씨는 이달 3일 운전 중 뺑소니 차량에 의해 뒤범퍼가 찌그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박 씨가 사고 장면을 확인하려고 후방 블랙박스를 재생시켰지만 도주 차량의 번호판 식별은 물론 차종, 차량 색깔을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질이 좋지 않았던 것. 박 씨는 "전방 카메라는 깨끗하게 촬영되는 반면 후방 카메라는 화질이 엉망이다"며 "해상도가 좋다는 말에 큰맘 먹고 블랙박스를 샀는데 정작 사고가 일어나고 보니 후방 카메라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불평했다.

저화질의 차량용 블랙박스가 운전자의 속을 썩이고 있다. 일부 제품은 차량번호판도 식별하지 못할 정도이지만 현행 법규상 이를 제재할 마땅한 수단은 없는 실정이다.

◆저질 블랙박스 범람=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150만 대 이상의 차량에 블랙박스가 장착됐지만 시중에 유통되는 차량용 블랙박스 대부분은 불량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11월 중소기업진흥공단과 소비자시민모임이 자동차부품연구원에 의뢰해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11개 차량용 블랙박스 제품의 품질을 점검한 결과 모든 제품이 KS 규격 기준 26개를 만족하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KS 규격 기준 중 소비자 불만이 가장 많은 카메라 화소 수와 영상 데이터 저장 주기, 번호판 인식 가능성 등 16개 항목만을 뽑아 벌인 품질 조사 결과는 더 좋지 않았다. 14개 항목 이상을 충족한 제품은 6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1개 제품 중에는 KS 규격 기준인 90만 화소(영상 입력 화소 기준)에 한참 못 미친 35만 화소의 제품도 있었다. 10m 이상 거리면 식별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개중에는 주'야간 모두 차량 번호판을 식별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고해상도라는 광고만 믿고 덜컥 비싼 블랙박스를 구매한 소비자들은 저질 블랙박스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전'후방 일체형 블랙박스의 경우 전'후방 카메라의 해상도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방이 해상도가 높은 편이며 후방은 전방보다 낮다. 하지만 일부 업체에서는 선명하게 녹화되는 전방 카메라 해상도만 부각시켜 마치 전'후방 모두 해상도가 높은 것처럼 보이게 해 소비자를 혼란스럽게 했다.

◆제재 수단 없어=이처럼 '눈뜬장님' 블랙박스가 버젓이 팔리고 있지만 이를 제재할 마땅한 수단은 없는 실정이다. 현재 블랙박스 관련 규제 사항은 전자파 관련 KC 인증이 전부. 2011년 기술표준원이 마련한 제품의 성능이나 품질에 관한 KS 규격 기준은 임의 기준일 뿐 강제 기준도 아니어서 저질 블랙박스의 범람을 막을 수 없다.

저질 블랙박스 유통의 피해는 블랙박스만 믿고 안심하던 소비자들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 교통사고의 원인 규명을 위해 블랙박스를 샀지만 정작 사고가 났을 땐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지난해 한국소비자원에 블랙박스와 관련한 상담 건수는 2천355건. 지난해 1천100건에 비해 2배 넘게 늘었다. 이 중 블랙박스의 오작동 등 품질에 관한 상담이 34.4%(811건)로 가장 많았다.

소비자시민모임 관계자는 "블랙박스의 품질을 보장해 줄 제도가 없어 불량 블랙박스에 속아 넘어가는 소비자들이 속출하고 있다"며 "블랙박스 제품 성능 인증 제도를 도입해 품질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블랙박스를 살 때 ▷카메라에 실제 저장되는 화소 수 ▷야간 촬영 가능 여부 ▷완전 방전 방지 기능 유무 ▷80℃ 이상 고온에서 작동이 가능한지 등을 확인한 후 구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동차부품연구원 스마트자동차기술연구센턴 유시복 센터장은 "블랙박스는 제품 설명만으로는 성능을 추정하기 어려운 제품이다"며 "사용 전까지는 문제점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존에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 평가를 참고하여 구매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신선화기자 freshgir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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