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월급 털어 학생 돕는 '거지 교수' 김용일 계명대 부총장

가난·병약·꼴찌… 내 삶의 '3대 축복'은 제자들 성장 이끄는 나의

김용일 부총장은=대구 토박이인 김 부총장은 명덕초교
김용일 부총장은=대구 토박이인 김 부총장은 명덕초교'협성중'달성고를 거쳐 계명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독일 튀빙겐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5년에는 호헌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캠퍼스 커플로 계명대에서 영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부인 성정심 씨는 지난해 5월 대구 서구에 개척교회를 연 목사이다. 김 부총장은 "학교 다닐 때 워낙 바보처럼 살아서 동창회에 가면 '네가 어떻게 교수가 됐냐'고 우스갯소리를 던지는 친구가 많다"며 "선친의 말씀대로 아내의 말을 존중하면서 살아온 덕분"이라고 말했다. 중'고교 시절 차비가 없어 1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서 통학했다는 김 부총장은 가난이 오히려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요즘 취미는 마라톤으로 3시간 10분대의 기록을 갖고 있다.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이상헌기자

그는 가난하다. 주머니에는 항상 여유가 없다. 전 재산이라고 해봐야 다섯 식구가 17년째 살고 있는 변두리 낡은 32평 아파트 한 채뿐이다. 이마저도 은행 빚을 빼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월급은 내 돈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산 지 오래됐다. 대학 보직을 맡기 전에는 구내식당에서 짜장면으로 점심을 때우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부자'다. 그를 존경하는 제자들이 많고, 그를 아끼는 스승들이 많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서다. '거지 교수' 계명대 김용일(56) 학생부총장의 이야기다.

◆가난해서 행복합니다

김 부총장은 1995년 모교인 계명대 철학과에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대학교수의 연봉도 그리 낮은 수준이 아니다. '거지'라는 별명을 얻은 게 수상하기만 하다.

"초짜 교수 시절이었지요. 우연히 한 학생이 병원비가 없어 애를 태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절반 정도를 보태려 했는데 그 아이는 나머지 절반을 구할 방법이 없다며 치료를 포기하겠다고 하더군요. 그 후 3일을 고민했습니다. 솔직히 금액이 만만찮았거든요. 그러나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니 돈 앞에 작아지는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결국 제가 다…."

김 부총장의 남모를 선행은 그 후 쭉 이어져 오고 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옛 성현의 말씀 그대로다. 등록금을 못 내는 학생을 위해 대신 빚을 내어서 납부해주거나 외국대학의 교환학생으로 떠나는 제자들에게 손수 장학금을 건넨 일이 다반사다.

대학본부 장학복지팀에게 그는 '경계 대상 1호'다. 대학 관계자는 "도와줄 방법이 없겠느냐며 이런저런 민원을 들고 수시로 찾아오는 바람에 제발 일주일에 한 번만 오시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교내 보건소에서 매주 수요일 열리는 무료 치과 진료도 그의 '작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달라는 그의 부탁을 초등학교 동창인 치과의사들이 흔쾌히 받아들여 벌써 8년째 이어지고 있다.

제자들만 김 부총장의 '사랑'을 받는 건 아니다. 학교 구성원 전체가 그의 관심 대상이다. 청소'식당 아주머니들에게도 수시로 식사를 대접하고, 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각종 기념일에는 초콜릿'사탕을 나눠주는 게 일과다. 그래서 그에게는 '빼빼로 킹(king)'이란 별명도 있다.

"부총장은 특별한 자리가 절대 아닙니다. 하는 일이 다를 뿐 청소하시는 분이나 설거지하시는 분과 똑같이 학교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죠. '함께 있어 행복해지는 사람'이 되겠다는 인생 목표를 향해 저도 노력할 따름입니다."

◆피란민 수용소에서 대학 강단까지

김 부총장은 "나눔의 삶을 살게 된 데는 성장과정에서의 고난이 크게 작용했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몸서리나는 가난, 학교조차 못 다닐 정도의 병약(病弱)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북실향민 2세다. 정확히 말하면 6'25전쟁 당시 대구에 설치됐던 피란민 수용소가 고향이다. 선친은 구둣방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집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설상가상 그는 초교 2학년 때부터 원인 모를 병으로 앓아누웠다. 5학년을 마칠 때까지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학교 갔다가 쓰러져 병원에서 눈 뜬 일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일주일을 못 넘길 거라고 했고, 주변에선 '쟤는 빨리 죽는 게 더 낫다'는 말도 부모님께 했다고들 합니다. 저를 기억하는 동창생도 별로 없어요. 그런데 저도 진짜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우리 반 꼴찌가 누구였을까 하는 거예요. 제가 72명 중에 71등이었거든요. 하하하."

독실한 기독교인인 어머니는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살림이었지만 형편이 더 어려운 이웃집에 음식을 나눠주고,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생사를 오가는 허약한 아들을 뒀던 터라 아픈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독일 유학 시절, 우리 가족은 휴일이면 동네 노인요양시설에 가곤 했습니다. 제 부모님은 아니지만 어르신들을 위로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하루 3시간씩 자면서 주경야독하는 현실이 너무 힘들었지만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제가 죽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셋째였던 그가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것 역시 어머니의 뜻이었다. 허약한 몸으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공부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외조모가 남긴 유일한 유산이었던 금가락지까지 학비에 보태졌다.

계명대 목요철학원장인 백승균 명예교수는 그가 '아버지'로 생각하는 은사다. 학교생활에 흥미를 갖지 못한 채 방황하던 그에게 화두를 던져주고, 결국 학자의 길로 이끌었다.

"학부 3학년 2학기 때 들었던 백 교수님의 실존철학 강의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실존은 결단이다'라는 말씀에 전율을 느꼈죠.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바뀐다는 깨달음을 그때 얻었습니다. 그 덕분에 4학년 때 장학금이란 걸 처음 받아봤고, 대학원까지 진학하게 됐습니다." 그가 유학을 떠날 때 비행기표를 사주며 격려했던 백 교수에 대한 김 부총장의 애절한 '사사곡'(思師曲)은 스승의 날을 기념해 개최됐던 수기 모집에서 교육부 장관상에 뽑히기도 했다.

◆의식이 바뀌어야 삶이 바뀐다

김 부총장은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학생처장을 지냈다. 철학과는 물론 인문대 교수로는 처음이었다. 5년을 연임한 경우도 드물다. 통상 대학 보직은 2년 임기다. 그는 1년의 연구년을 보낸 뒤 지난해 다시 학생부총장에 임명됐다.

학생처장의 이미지도 바꾸어놓았다. 총학생회 등 학생자치기구에 대한 대학 측 카운터파트너에서 학생을 가장 잘 이해하는 교수로 자리매김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밤새 통음(痛飮)하며 인생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가 처음 도입한 학생들의 해외기업 탐방, 성적우수 학생 리더십 연수 등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가난과 병약, 성적 꼴찌'를 인생의 3대 축복이었다고 여기는 그의 생생한 경험은 강의에 자연스레 녹아있다. 재학생은 물론 예비 입학생을 상대로 한 각종 행사에서 그의 특강은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 1위에 매번 꼽힌다. 그래서 얻은 또 하나의 별명이 '특짱'이다.

"재학생 가운데 50% 정도는 제 이름을 알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식이 바뀌어야 삶이 바뀐다'는 주제의 강연을 자주 하는데 학생들이 쉽게 공감하는 것 같아요. 솔직히 저희 학교 학생들의 입학 성적이 최상위권은 아니지요. 아무 목적의식 없이 진학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내버려두지 않고 계속 채찍질하다 보면 졸업할 때는 틀림없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기독교인이지만 성철 스님의 열반송을 좋아한다고 했다. "큰스님께선 당신의 죄가 수미산보다도 높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남의 도움으로 이뤄지고, 감사해야 하지만 우리는 그만큼 베풀지 못하고 산다는 뜻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지난해 5월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산티아고 순례길 830㎞를 걸으면서도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름 열심히 산다고 자부해왔지만 돌이켜보니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더 크더군요."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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