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2부-근대의료의 도입 <8>일제 치하의 동산기독병원

"병원 문전에만 가도 살아난다" 환자들 연일 북적

동산기독병원(1930년대) = 1931년 미국 전역에서 독지가들로부터 모금한 3만5천달러를 들여 새로 지은 3층 규모의 현대식 병원.
동산기독병원(1930년대) = 1931년 미국 전역에서 독지가들로부터 모금한 3만5천달러를 들여 새로 지은 3층 규모의 현대식 병원.
플레처 원장
플레처 원장

제중원의 초대 원장이던 우드브릿지 존슨 원장이 1910년 가을 건강 탓에 사임한 뒤 후임 원장으로 취임한 인물은 아치볼드 그레이 플레처(Archibald Gray Fletcher)였다. 플레처는 1911~1941년 원장으로 근무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제가 미국을 적성국가로 분류해 그를 강제 추방할 때까지 근무한 것이다. 플레처 원장이 취임하면서 '동산기독병원' 시대가 열렸고, 일제 강점기 동안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체계를 갖춘 병원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플레처 원장, 동산기독병원 시대 열다

플레처는 1882년 8월 16일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났으며, 토론토에 있는 영미직업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아이오와주 수(Sioux) 와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배웠다. 1905년 우수한 성적으로 의대를 졸업한 뒤 2년간 네브래스카주 오차드에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1907년 7월 해외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선교와 함께 의료를 보급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개인적인 성공을 뒤로한 채 아이오와주 '수 시립 사마리탄병원'에서 1년 이상 봉급도 받지 않고 수련의사로 의술을 키웠다. 그리고 마침내 1908년 12월 한국 선교지부에 발령받았다.

플레처 원장 취임 후 동산기독병원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연간 입원환자 1천 명, 외래환자 5천 명을 진료했고, 1914년엔 3천달러를 들여 외래진료소를 증축했으며, 다시 1927~1928년 1만달러로 난방시설과 당시로선 첨단 시설을 갖춘 새 외래진료소를 갖추게 됐다.

이때부터 동산기독병원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종전과 달리 주요 진료과목별로 독립 운영하는 이른바 종합병원의 면모를 갖추게 됐고, 미국인 의료선교사의 독주 시대가 끝나고 서울 등지에서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한국인 의사들이 주요 부서 책임자로 임명됐다. 내과 손인식, 안이비인후과 김용석, 외과 김재명 과장 등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1930년대 현대식 병원으로 거듭나

병원 안에 별도로 병리검사실과 X-선 검사실도 갖췄다. 1927년 한 해에만 혈액검사 960회, 기타 검사 4천 회가 이뤄졌다고 한다. 대구에 있는 다른 병원 의사들까지 동산기독병원 검사실을 이용하 실습과 연구를 할 정도였다. 비록 X-선 장비가 최신 모델은 아니었지만 활발하게 이용됐다. 1929~1930년 방사선촬영이 571차례 있었고, 위장에 바륨을 투여한 뒤 X-선 촬영을 해서 질병을 확인하는 '장조영검사' 191차례나 있었다.

1929년 5월~1930년 4월 일 년간 외래환자는 모두 1만8천25명에 이르렀다. 남자 환자가 1만1천360명으로 여자의 약 2배에 이르렀다. 형편이 어려워 무료로 진료받은 환자도 3천783명이나 됐다.

1931년엔 3만5천달러를 들여 3층 규모의 현대식 병원을 새로 지었다. 당초 5만달러를 모금할 계획으로 미국 전역에 있는 교회와 독지가들을 대상으로 모금 문안을 보냈다.

'병원은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용할 기독교 병원입니다. 5만달러 이상이 필요한 병원 설립 계획에 헌금하실 분은 뉴욕시 156번지 카터 씨 앞으로 또는 대구로 직접 보내시면 됩니다.' 산 세부내역도 함께 밝혔다. '술실 2천달러, 6개 병동 각 1천400달러, 산과 및 소아과 병동 각 800달러…' 등이었다.

◆문전에만 가도 살아난다는 소문까지

당시 동산기독병원에는 원장 플레처 외에 모든 의료진은 한국인이었다. 내과 2명, 외과 3명, 산부인과 1명, 안이비인후과 2명, 인턴의사 3명, 약제과 2명, X-선과 2명, 검사실 2명 모두 한국인이었고 의학전문학교를 나온 뒤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거나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들도 꽤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의료진에 대한 호칭이었다. 일반 사무직원이나 기사, 약제과 직원 등에게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데 비해 의사는 그저 '김 의사, 이 의사'로만 불렀다고 한다.

의사들이 입는 가운도 일반 직원과 똑같았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의아한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무감각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외부에서 온 환자들은 가운을 입은 사무원들을 의사로 착각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간호직과 사무직, 기타 업무직을 포함한 직원들이 100여 명에 이를 만큼 인력과 장비를 갖춘 동산기독병원은 당시로선 한국인 진료를 위한 경상도 지역의 유일한 종합병원이었다. 병원 문전에만 이르면 죽을 사람도 살아난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

특히 외래진료소는 매일 180명 정도가 모여들 정도로 북적였는데, 주로 내과 손인식, 안이비인후과 장원용 의사를 찾는 환자들이었고 다른 과 환자는 소수였다. 최대 입원 가능 환자는 160명, 평균 입원 환자는 80명이었다.

◆한국인 의사들, 인턴제 도입

1940년 3월 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동기생 권오석, 김도정, 장동면 3명이 당직의사로 부임했다. 앞서 한국인 의사들 중에 인턴의사 3명이 바로 이들이다. 세브란스병원은 1894년 미국의 부호인 세브란스의 지원을 받아 에비슨이 세웠다. 1905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인정 아래 의학교가 시작됐고, 1908년 6월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다.

세브란스의학교는 1917년 5월 의학전문학교로 공식 허가(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16년 4월)를 받았고, 1934년 3월 이후 졸업생부터 의사면허시험 없이 일본 본토 및 식민지 영토에서 개업할 수 있게 됐다. 이후 경성의전과 세브란스의전은 우리나라에서 근대 의사를 배출하는 양대 산맥 역할을 했고, 1933년부터 대구와 평양 의전이 여기에 가세하게 됐다.

당초 권오석 등 3명이 당직의사로 부임하기 전엔 당직의 한 명이 있었다. 주중엔 낮시간 근무하는 의사가 퇴근한 오후 5시부터 이튿날 오전 9시까지, 일요일'공휴일엔 하루 종일 입원 및 응급 환자를 돌보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당직의 3명이 부임하면서 뭔가 불합리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이들은 한 사람씩 교대로 당직을 서고, 나머지 2명은 낮시간 각 진료과와 X-선실, 검사실, 수술실, 약제과 등을 2~3개월 단위로 돌면서 일을 배우기로 했다.

바로 인턴(수련의) 제도인 셈이다. 이런 제도는 세브란스병원에서만 유일하게 시행하고 있었다. 이들의 제안을 받은 플레처 원장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이후 자리 잡게 됐다. 1940년부터 동산기독병원은 인턴제를 실시한 셈이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 = 의료사특별위원회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