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중소기업 현장에서 말하는 '손톱 밑 가시'] <상>이제 '中企 힐링'을

옥죄는 규제, 제도 아직 많다

외국인 근로자들을 많이 고용하는 섬유업계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사업장 변경 제도를 악용하는 탓에 관리에 어려움이 많다고 호소했다. 드레스 자수 생산업체인 대구 동구 영대산업에 취업한 필리핀 출신의 여성 근로자가 생산라인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외국인 근로자들을 많이 고용하는 섬유업계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사업장 변경 제도를 악용하는 탓에 관리에 어려움이 많다고 호소했다. 드레스 자수 생산업체인 대구 동구 영대산업에 취업한 필리핀 출신의 여성 근로자가 생산라인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9988'. 국내 산업에서 중소기업은 전체 기업체 수의 99%를 차지하고, 고용인원의 88%를 차지한다. 중소기업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의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박근혜 대통령도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감안해 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손톱 밑 가시'로 표현하며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정했다. 더욱이 대구는 중소기업 도시다. 대기업이 전무한 상황에서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통해 지역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중소기업이 어려움에 처하면 지역 경제 전체가 흔들리는 이유다. 반대로 중소기업이 탄탄한 경쟁력을 가질 때 지역 경제도 주름살이 펴진다. 지역의 중소기업들이 현장에서 겪는 각종 제도적 문제점을 살펴본다.

◆은행 불법 책임까지 떠안기는 제도

지역의 A시행사는 부도 위기에 처했다.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2003~2005년 400억원가량을 빌린 것이 시발이 됐다. 분양이 순조롭게 진행돼 2005년과 2006년에 걸쳐 원금과 이자, 금융자문 수수료 등으로 600억원을 상환했다. 하지만 부산저축은행이 2011년 불법으로 각종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을 하면서 부실로 이어졌고 급기야 영업정지 결정이 나면서 A회사에도 암운이 드리웠다. 예금보험공사가 부산저축은행을 접수(?)한 후 회계장부를 들춘 결과 A회사가 갚았던 600억원이 고스란히 채무로 잡혀 있었던 것. 부산저축은행이 무리하게 PF대출을 하면서 서류를 조작, A회사에 추가로 600억원을 빌려줬다고 분식회계를 한 탓이다. 예금보험공사는 A회사에 채무독촉장을 보내기 시작했고, 지난해 3월에는 A회사 재산을 가압류했다. 심지어 대표이사 직무정지 가처분까지 했다. A회사 측은 입출금 내역자료 등 근거 자료를 들이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예금보험공사 측도 A회사의 주장을 이해는 했지만 법적으로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예금보험공사는 A회사에 소송을 제기했고, 현재 재판 중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충격을 받은 이 회사 B대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며 억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B대표는 청와대, 기획재정부, 권익위원회 등 정부 기관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수차례 제출했지만 아직은 별다른 조치가 없는 상태. 이 때문에 신규사업은 고사하고 직원들 월급을 줄 돈도 없는 지경이다.

B 대표는 "예금보험공사도 분식회계를 통해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현행법상 소송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하더라"며 "결국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소송 비용과 시간, 정신적 피해 등은 고스란히 우리가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인증, 인증…넘쳐나는 인증서

경북 청도의 플라스틱 수도관 전문 생산업체인 세한합성산업㈜. 이 회사 류호대(42) 대표는 인증서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ISO SDR11(수도관)과 PL 마크, NET와 KS마크 등 보유한 품질표시 인증서만 총 15개. 인증서가 많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1, 2년 주기로 이뤄지는 인증서 준비에 들어가는 시간도 문제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 지난해 류 대표는 관급공사 인증'심사 비용으로만 1억800만원을 지출했다. 100만원에서 600만원까지 심사 비용도 인증 기관별로 천차만별이다. 지난해 관급공사 매출만 48억원(전체 80억원)인 것을 감안하면 전체의 2.5% 정도가 고스란히 인증 시험과 심사비로 들어간 셈이다. 류 대표는 "인증서 갱신 기간이 보통 1, 2년으로 아주 짧아 매년 이 정도 비용이 지출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한숨지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인증서 수십 개가 필요한 이유는 뭘까. 현재 관급공사 물품 계약은 조달청의 '나라장터'를 통해 이뤄진다. 플라스틱 업체가 나라장터 MAS(다수공급자계약제도) 조달에 등록해 입찰받으려면 보통 5개의 인증서가 있어야 한다. KS마크와 한국플라스틱협회에서 인증하는 PL마크, 신기술 인증 마크인 NET마크 등이다. 관급공사가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니 류 대표도 '울며 겨자 먹기'로 매년 인증서를 갱신하고 있다. '인증서 전쟁'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조달청의 '우수조달제품'을 따려면 추가로 다른 인증서가 필요하다. 우수제품으로 지정되면 관련 법에 따라 수의계약을 할 수 있어 납품 업체에는 아주 중요하다. 세한합성산업㈜은 지난해 '피복형 편수 하수관' 제품이 우수조달제품으로 지정됐다. "기술력이 있는 모든 업체는 여기에 들고 싶어하죠. 우수 제품으로 지정되려고 벤처와 이노비즈, Q마크, K마크, KC마크, 중소기업청에서 인증하는 성능인증서를 추가로 땄습니다."

조달 물품 계약을 맺는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수주를 받은 업체 측에서 "기술력을 못 믿겠다"며 별도의 시험이나 인증 절차를 추가로 요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예를 들어 대구의 A구청에 수도관을 납품하면 그곳의 감리업체에서 별도의 시험 항목을 추가해 인증을 요구하는 식이다. 류 대표는 "결국 조달청 검사를 100% 믿기 힘드니까 제품 검사를 다시 해달라는 말이다. 수요처의 추가 인증까지 응하다 보면 진이 다 빠질 정도"라고 털어놨다.

플라스틱 업체들도 인증 절차의 필요성은 동감한다. 인증서가 없다면 제품 신뢰도를 평가할 수 없기 때문. 하지만 중복되는 인증 절차와 1, 2년으로 짧은 인증서 갱신 기간 때문에 현장에서는 계속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류 대표는 "운전면허증처럼 통합된 기관에서 하나의 인증서를 발급하고 주기적으로 갱신하면 될 텐데 조달청은 조달청대로, 수요처는 수요처대로 계속 별도의 인증과 심사를 요구하니 죽을 지경이다. 만약 인증기관을 하나로 통합할 수 없다면 수백만원 하는 인증 심사 비용이라도 낮춰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옮겨 달라" 외국인 근로자 사업장 변경

1991년부터 드레스 자수 생산업체인 영대산업을 설립해 운영하는 김영수 대표. 제품을 모두 일본, 동남아, 유럽 등지로 수출해 외화 획득에 일익을 담당하는 김 대표는 스스로 애국자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 얘기만 나오면 평소 점잖던 목소리가 높아진다. 김 대표는 국내 인력 고용이 어려워지면서 외국인 근로자를 채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고, 현재 외국인 근로자 5명을 채용하고 있다. 많을 때는 38명까지 고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2005년 개정돼 '사업장 변경' 제도가 신설되면서 김 대표에게 시련이 시작됐다. 앞서 외국인 근로자 연수제도 때는 한 회사와 근로계약을 맺으면 5, 6년 동안 꼼짝없이 근무해야 했다. 그러나 사업장 변경 허용 제도가 신설된 후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근로 환경 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사업장 변경을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 통상 3년 동안 특정 회사와 계약을 하고 입국하지만 막상 근로 조건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고용주에게 사업장 변경을 요구한다는 것. 사업장 변경은 해당 사업주가 허락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국내 인력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기 때문에 사업주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사소한 잘못을 가지고도 고용노동청을 찾아가 민원을 제기하기도 한다는 것. 김 대표는 "고용노동청에 불려가서 근로자를 착취하는 기업주로 오해받고, 인격적으로도 모욕감을 받는다"며 "법률이 외국인 근로자의 인권 보장에만 신경 쓰다가 제조업을 모두 죽인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해 9월 입국한 한 외국인 근로자도 현재 사업장 변경을 원하고 있지만 김 대표는 외면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제야 어느 정도 수련이 됐는데 다른 업종으로 가면 2, 3개월 동안 기계를 세워야 할 지경"이라며 "숙식 제공에 월 220만원 정도의 급여를 주는데도 이들은 근로 환경을 탓한다"고 했다. 또 "사업장 변경 제도가 도입된 후 24시간 공장을 가동해야 하는 섬유업계는 외국인 근로자들 때문에 피가 마를 지경"이라며 "정부의 금융 지원은 기대도 안 한다. 제발 기업이 정상 운영되도록 근로자 수급만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기획취재팀=이창환기자 lc156@msnet.co.kr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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