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가명'45) 씨는 병원에 갈 때마다 항상 깔끔한 옷으로 골라 입는다. 비록 가난 때문에 정부 도움으로 연명하고 있지만 그런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다. 학영 씨는 부동산 중개회사와 철거 용역 회사에서 일할 때만 해도 보육원에 헌 옷도 기부하는 등 남을 도와주며 살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도움을 받는 처지다. 학영 씨는 이런 자신의 처지가 잘 적응되지 않는다.
"몸만 건강하면 당장이라도 부동산 몇 건 매매하고 철거를 원하는 건물주를 찾아 일을 벌이고 싶지만 몸이 아프니 전혀 일을 할 수가 없네요. 두 딸 시집보낼 돈도 벌어놔야 되는데 이렇게 자리 보전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죠."
◆가장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사람 좋아하고 남자다운 성격이었던 학영 씨와 부동산 중개 일, 건물 철거 용역 일은 궁합이 잘 맞았다.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영업을 하고 계약을 성사시키는 등 능력을 발휘했다.
열심히 일해오던 그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친 것은 17년 전. 사업을 하는 친구 몇몇에게 겁 없이 1천만원 또는 2천만원짜리 대출 연대보증을 서 준 것이 문제였다. 학영 씨에게 보증을 부탁했던 친구들은 사업이 망하자 하나둘씩 학영 씨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종적을 감췄다. 학영 씨의 빚은 삽시간에 7천만원까지 불어났다.
"매달 채권추심회사에서 빚 독촉 편지가 날아오고 채권추심원의 전화도 심심치 않게 걸려옵니다. 개인파산제도도 생각해봤죠. 하지만 혼자 힘으로 빚을 갚지 못하는 내 모습이 싫어서 아직까지 파산 신청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영 씨는 빚을 갚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 부동산 계약 한 건을 성사시키기 위해 몇 달을 매달리기도 했고, 대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철거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악착같이 일하다 보니 가정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접대를 위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일상이었고, 그러다 보니 아내와의 다툼도 잦아졌다. 결국 8년 전 학영 씨는 아내와 이혼하기에 이르렀다. 이혼할 당시 열네 살이었던 큰딸과 열두 살이었던 작은딸은 학영 씨가 맡아 키우기로 했다.
"이혼 이후 가정이 무너지니까 저도 방황하게 되더군요. 1년 동안 술만 계속 마셔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 옆에 남아 있는 두 딸을 보곤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두 딸을 나 혼자서 잘 키워야 된다는 사명감이 생기면서 방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C형 간염의 두려움
너무 열심히 일한 때문이었을까, 3년 전 학영 씨는 결국 사무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날은 학영 씨 어머니의 제사를 지낸 다음 날이었다. 학영 씨는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챙겨와 자신이 일하는 부동산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나눠 먹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휘청거리면서 앞으로 넘어졌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 학영 씨는 그 길로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병원에서는 '뇌출혈'이라고 했다.
"행운이었던 건 일찍 발견했다는 겁니다. 이미 뇌의 실핏줄들이 터져서 흘러나온 피가 머리를 뒤덮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주사제를 이용해 더 이상 피가 새어나오는 것을 막아 더 나빠지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큰 병이 절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학영 씨의 병은 뇌출혈이 전부가 아니었다. 병원에서는 학영 씨에게 뇌출혈과 함께 C형 간염도 발견됐다고 말했다. 평소 술을 먹어도 잘 취하지 않는 데다 다음날 숙취조차 느끼지 않고 살아온 학영 씨였기에 충격은 더했다. C형 간염이 간암으로 발전하면서 세상을 떠난 친구까지 보아 온 터라 두려움도 컸다.
"C형 간염이란 말을 듣고 같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친구 몇몇이 생각났습니다. '나도 그 친구들처럼 세상을 뜨는 건가?'라는 생각에 하늘이 노래지더군요. 안 그래도 뇌출혈이 와서 건강을 많이 잃었는데 거기에 C형 간염이라니…."
뇌출혈에다 C형 간염을 앓기 시작하면서 학영 씨는 하던 일을 모두 접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철거 공사를 따내고 부동산 계약을 하기에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청은 학영 씨가 근로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지정했다.
◆"두 딸 때문에 살아야 돼요."
학영 씨가 마주한 가장 큰 걱정은 약값이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보조금을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학영 씨가 한 주에 쓰는 약값은 20여만원. 1년 전만 해도 이 돈이면 한 달 약값이었다. 학영 씨가 C형 간염 치료를 위해 맞고 있는 주사제는 보험이 48회밖에 적용되지 않는데 1년 전 보험 적용 횟수를 초과, 더 이상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100만원 남짓 보조금이 들어와요. 하지만 한 달 동안 들어가는 약값에다 각종 공과금, 집세, 남아있는 빚까지 갚다 보면 식비조차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접었던 부동산 중개 일을 조금이나마 다시 하는 중이에요."
학영 씨의 목표는 '적어도 두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눈을 감는 것'이다. 두 딸은 학영 씨가 방황하며 가정을 챙기지 못할 때도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줬다. 학영 씨는 웬만해선 집이 어렵다는 말을 딸들에게 잘 하지 않는다. 괜히 기가 죽을까 봐 걱정이 돼서다. 큰딸은 지역 한 전문대학 유아교육과에 다니는데 근로장학생으로 뽑혀 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되지만, 재수를 결정한 작은딸은 어떻게 뒷바라지를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선다.
학영 씨는 두 딸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학영 씨는 두 딸이 성인이 돼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모습은 보고 죽어야 여한이 없을 것 같다.
"만약 두 딸이 없었다면 저는 실의에 빠져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결정을 했을 거예요. 정말 지치고 힘들 때 사랑하는 두 딸이 큰 힘이 됐어요. 지금의 병도 두 딸을 보면서 이겨낼 겁니다."
이화섭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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