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학교 박경규(2013년 2월 퇴임) 명예교수와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서 올해 경북대로 편입,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준경 씨는 미식축구로 통했다. 한국 미식축구의 산파역할을 했던 박 교수와 미국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학교 미식축구 대표로 활약했던 준경 씨. 둘은 경북대 미식축구 감독과 선수로 새로운 인연을 맺었다.
서울대 4학년이던 1973년. 전국대회 우승 문턱에서 고배를 마신 뒤 '반드시 우승컵을 들어 올리겠다'며 일부러 대학원에 진학한 박 교수. 1983년 경북대 미식축구팀을 창단했고, 국제미식축구연맹 창단 멤버로, 또 아시아연맹대표 집행위원으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2005년부터 2011년까지는 대한미식축구협회 회장을 지내는 등 인생의 대부분을 미식축구로 채운 박 교수와 유학시절의 외로움과 동양인이라는 멸시를 한 방에 날리게 해 준 게 미식축구였다는 준경 씨. 둘의 미식축구 이야기는 쉼이 없었다.
-미식축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박경규 명예교수(이하 박 교수)=1960년대 초 미국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듣고, 미국 문화를 따라하는 게 유행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하셨던 아버지로부터 미식축구 이야기를 들었고, 우연히 AFKN서 미식축구 경기를 보면서 관심을 뒀다. 1966년 서울대(농공학과)에 입학해 미식축구부에 가입했다. 당시 미식축구부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우람한 체격에 박력 넘치는 스포츠, 처음에는 '멋' 때문에 미식축구를 시작한 것 같다.
▶박준경(이하 준경)=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일 때문에 미국에서 산 적이 있다. 초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대학 미식축구 경기를 보러 갔는데 10만 명이 들어찬 관람석,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에 놀랐다. 중학교 2학년 때 다시 미국(시애틀)으로 공부를 하러 가게 됐다. 축구를 하고 싶었으나 당시 미국에서 축구는 인기가 없고 여자들이 하는 스포츠로 인식됐다. 큰 덩치 때문에 미식축구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축구를 한 덕분에 킥이 좋아 곧바로 주전을 꿰찼다. 고교(시애틀킹스) 졸업 때까지 학교 대표팀으로 활약했다. 고2 때는 학교 최우수선수로 뽑혔고, 고3 때는 한국인 최초로 주장을 맡았다.
-나에게 미식축구란.
▶준경=어린 나이에 외국생활은 힘들었다. 동양인이라고 무시도 당했다. 처음 미식축구부에 들어갔을 때 팀원들 역시 동양인을 생소하게 여겼다. 킥이 좋아 바로 1부에 들어갔고, 소질을 보이자 주전 선수가 됐다. 그때부터 이방인이 아닌 팀원으로 대해줬다. 미국 친구들을 사귀는 게 수월해졌고, 그들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낄 수 있었다. 미식축구는 책에서 배우지 못한 많은 것도 가르쳐줬다. 항상 남을 배려하는 마음,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심어줬다. 미국에서 미식축구선수의 프라이드는 강하다. 선망의 대상인 만큼 공부도 잘해야 했고 자기관리도 철저히 해야 했다.
▶박 교수=미식축구와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48년째다. 대학시절엔 선수로, 그 뒤에는 미식축구부 감독으로서, 또 국내 및 국제기관의 간부로 인연을 이어왔다. 미식축구는 인생이다. 미식축구는 모든 스포츠의 장점을 함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관과 철학 등 무수히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교수로 강단에 섰을 때도 학생들에게 미식축구가 주는 이런 가르침을 전하려 노력했다. 앞으로 돌진해가는 도전 정신, 후보부터 주전이 되기까지의 인내와 꾸준한 자기관리, 항상 팀 속에서 녹아나는 팀워크 등은 모든 사회생활'인생살이서 갖춰야 할 덕목과 맞물려 있다.
-기억에 남는 순간은.
▶박 교수=대한미식축구협회장으로 일하던 2007년, 제3회 미식축구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지역 최종예선에 나섰을 때다. 2005년부터 일본인 코치와 재일교포 선수를 데려와 팀을 꾸리고 조직력 강화에 애를 썼다. 그 대회서 홈팀 호주를 22대13으로 꺾고 역사적인 국제대회 첫 승리를 거뒀다. 그 덕분에 그해 7월 일본 가와사키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 출전할 수 있었고, 프랑스를 3대0으로 누르고 6개국 중 5위를 차지했다. 모든 수고로움이 한 번에 날아가는 짜릿한 감동을 맛봤다.
▶준경=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던 고3 때다. 미국 고교에선 리그를 거쳐 주 대회에 출전하는 게 최고의 목표다. 주 대회 출전권이 걸린 플레이오프서 엉뚱하게 패해 매년 뛰었던 주 대회를 뛰지 못했다. 고교 졸업할 때 일부 대학에서 선수 제안을 받았는데, 일리노이대를 선택하며 미식축구 선수 생활을 끝냈다. 결국, 그 경기가 마지막 경기가 됐다.
-앞으로의 소망은.
▶준경=미식축구가 주는 매력을 평생 누리며 살고 싶다. 경북대에 편입한 것도 미식축구부 때문이다. 미국보다 환경이 열악하지만, 박 교수님의 노력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주 5회 연습을 할 만큼 훈련 스케줄도 빡빡하고 선후배 간의 정도 끈끈하다. 팀의 일원으로서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로, 더 나아가서는 전국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려 보고 싶다.
▶박 교수=대학 정년퇴임을 하고 나니 그동안 '파트타임'으로 하던 미식축구 일을 '풀타임'으로 할 수 있어 좋다. 퇴임이 아쉽지 않은 건 미식축구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 미식축구 발전을 위해 나름 적잖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더 많다. 올해 창단 30주년을 맞은 경북대 미식축구부 30년사 집필에다, 일본 팀과의 교류전도 준비해야 한다. 미식축구 홈페이지를 만들고, 그간 모은 많은 자료를 정리해 국내 미식축구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다져놓고 싶다. 올바른 지도자 양성에도 힘을 쏟고 싶다. 미식축구에 바친 인생이 후회되지 않도록 마무리를 잘하고 싶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박경규(65)
경북대 명예교수. 생명산업기계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올해 초 정년퇴임 했다. 대학 때 선수를 시작으로 국제미식축구연맹 수석 부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경북대 감독과 아시아연맹 회장을 맡고 있다.
◆박준경(26)
경북대 생명과학부 생명공학전공 3학년. 미국 일리노이대서 올해 경북대로 편입했다. 중학교 때 잠깐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고교 졸업 때까지 학교 미식축구 대표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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