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유행어가 있다. 이용태 (사)퇴계학연구원 이사장에게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일주일에 서너 차례씩, 1시간 30분이 넘는 강연을 꼿꼿한 자세로 이어간다. 지난해에는 '한 달에 한 가지 새 습관을 기르자'는 새 저서도 냈다. (사)박약회 회장, 국제퇴계학회 고문 등을 맡고 있으며 지난달까지는 학교법인 숙명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그를 '청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왕성한 사회활동 때문만은 아니다. 아직도 그에게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후세들을 제대로 가르쳐서 대한민국을 진정한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다. 국내 첫 컴퓨터회사인 삼보컴퓨터 회장에서 '인성교육 전도사'로 변신한 그를 가정의 달을 맞아 만나봤다.
◆국산 컴퓨터의 아버지에서 인성교육 전도사로
이 이사장이 인성교육에 관심을 갖게 계기는 2005년 삼보컴퓨터 명예회장에서 물러난 뒤 간만에 가진 손자와의 대화였다.
"그동안 공부 잘했니?"""네.""공부 말고 또 뭐 하는 게 있어?""농구요.""그래, 농구는 얼마나 잘하니?""우리 학년 선수예요." 할아버지의 질문에 단답형으로만 대답한 손자는 어색한 듯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아래층에 가서 컴퓨터게임을 시작했다.
"그때 '이 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을 손자에게 물려주고 싶었지만 잘 안 되더군요. 그래서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까 혼자 고민한 끝에 짧은 시간에, 재미있게, 가정교육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후 한 달에 한 시간씩 손자들과 딸'며느리들을 만났고, 달라진 손자들의 모습을 보게 됐죠."
이 회장이 전파하고 있는 인성교육의 방법은 '1-1-6 모델'로 요약된다. 가정에서 한 달에 한 시간씩 인성교육의 시간을 정하고, 6단계에 걸쳐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1단계에서 아이들은 교훈이 담긴 이야기를 읽고, 2단계에선 그 내용을 온 가족이 반복해 읽고 요약해보며 외운다. 3단계는 그 이야기에서 배울 교훈을 확인하는 과정이고, 4단계에서 교훈과 관련된 각자의 경험이나 의견을 나눈다. 부모는 이때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을 자녀에게 전할 수 있다. 5단계는 교훈과 관련해 가족 모두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정하는 것이고, 마지막 6단계에선 실천의 구체적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 여부를 확인한다.
"몸에 이로운 인삼이 싸고 맛있기까지 하다면 누가 안 먹겠습니까? 인성교육도 그렇습니다. 짧은 시간을 투자해 '싸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맛있게'해야 하는 겁니다. 모든 어머니들이 세상 사는 법을 가르치는 인성교육을 해서 아이들이 좋은 습관을 길러간다면 우리나라는 모든 사람이 밝고 친절하고 반듯한 참다운 선진국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 이사장의 인성교육 강의는 퇴계학연구원과 박약회(博約會)가 발판이 되고 있다. 지난해 전국 744개 단체에서 8만여 명을 교육하는 등 2005년 이후 20만 명이 강의를 들었다. 2003년 설립된 박약회는 고(故) 김호길 포항공대 총장 등 그와 지인들이 도산서원의 기숙사인 박약재((博約齋)에 모여 도덕국가를 재현하자는 취지로 만든 국민운동단체. 현재 4천여 명의 회원이 있으며 인성교육 등을 통한 유교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사장에게도 아쉬움은 있었다. 아직 인성교육이 본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인성교육이 온 국민의 미풍양속이 돼야 하는데 요원(燎原)의 불길로까지는 이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패러다임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탓이겠죠. 하지만 벌판에 내린 비가 물길이 없으면 낮은 데로만 흐르듯 인생도 편한 대로만 살면 아무 의미 없이 보내기 마련입니다. 저는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는 물길을 만드는 데 여생을 모두 바칠 생각입니다."
◆뿌리 깊은 유림가문의 전통이 교육 밑바탕
이 이사장은 삼보컴퓨터, 두루넷, 데이콤 등을 설립한 대표적인 IT산업의 선구자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PC를 생산했으며, 컴퓨터 통신과 인터넷을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우리나라가 IT 강국이 되는 기반을 닦은 최대 공로자 가운데 한 명이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경북 영해면 인량리의 뿌리 깊은 유림(儒林)이다. 그의 고향집인 '충효당'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돼 있고, 그가 말을 배울 무렵부터 한문을 가르쳤던 조부는 일제 치하에서 신식교육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아 손자가 학교도 다니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보수적인 가풍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첨단산업의 선각자가 배출됐다는 게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어렸을 때 어머니 품보다 할아버지 품에서 잔 날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게 일생의 양식이 됐습니다. 제가 기업을 운영할 때나 사회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생각하고 있는 인성교육에서나 영리 추구보다 정책 건의'계몽운동에 더 관심을 쏟는 것도 어르신들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조부께서 워낙 완고하셔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다니다 말다 했습니다. 허허허."
대화를 나누다 보니 4'24 재'보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한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자연스레 오버랩됐다. IT산업계의 후배인 안 의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제가 인생을 뒤돌아보면 아쉬운 게 몇 가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컴퓨터회사를 차리지 말고 공무원이 되어서 발전적인 정책을 내놓았더라면 국가에 더 기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가 이왕 회사를 만들었으면 정말 경영에만 충실해서 '애플'과 같은 세계적 기업을 만들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안 의원도 정치를 시작한 만큼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만한 중요한 정책을 많이 만들기 바랍니다. 그도 아니고 어정쩡한 자세로 일한다면 개인으로선 시간 낭비요, 사회로서는 인재의 낭비가 될 것입니다."
국내 기업 최초로 미국 나스닥에 직상장될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다가 두루넷의 몰락과 함께 법정관리의 아픔을 겪었던 삼보컴퓨터는 지난해 그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국제전화 서비스회사인 나래텔레콤 대표인 차남 이홍선 씨가 지난해 8월 회사를 다시 인수했다. 아들에게 무슨 조언을 해주느냐는 질문에 그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일이 되게끔 일하라'고 말하곤 합니다. 아이디어만으로는 안 되고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삼보컴퓨터도 10여 년 전 '아이패드'와 같은 제품을 만들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투자도 적지 않게 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고요. 잘 경영할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허허."
글'사진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