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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는 21세기 실크로드] <제3부> 5.키로스 대왕의 돌무덤

세번의 피정복·2600년 세월도 비켜간 '영원한 왕의 무덤'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직후, 키로스 대왕의 무덤 앞에 당도했을 때의 일화. 그는 키로스왕의 지석에 새겨진 글을 읽고 상의를 벗어 무덤에 덮어주며 머리 숙여 경배했다. "그대가 오리라 예상하고 오래전부터 여기 누워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나라는 내가 이룩한 것이며 너는 내 무덤을 파괴할 권리가 없다." 정복자는 정복자를 알아보는지 시대를 초월한 영웅의 무덤 앞에 한참 동안 젊은 영웅이 서 있었다. 기원전 331년 어느 날 페르시아 제국 최초의 수도 파사르가데에서의 일이었다.

시라즈 인근에 있는 페르세폴리스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달리면 황량한 벌판이 나타나고 파사르가데에 도착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곧바로 보이는 가장 중요한 유적이 대왕의 무덤이다. 사방이 확 트인 넓은 평지 한가운데 우뚝 서 있으면서 멀리서 보면 거대한 돌덩이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집트의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로 벽돌을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그 위에 그리스 이오니아 양식의 석관을 올려다 놓았고 지붕은 또 다른 양식, 주춧돌은 수메르 양식을 따름으로써 무덤 하나에 키로스가 지배했던 각 지역의 문화가 모두 배어 있다. 무덤의 재질은 주로 거대한 석회암을 사용했기 때문에 2천600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오늘날 이 파사르가데 일대는 키로스의 무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유적이 폐허로 변하고 약간의 석조 유물 흔적과 빈터만 남아 있어 관광객들의 흥미를 끌지는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와 페르시아 초기의 건축술을 엿볼 수 있다는 문화적 중요성 때문에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제국 최초의 수도였던 넓은 왕도 터에는 두 개의 궁전과 조로아스터교 신전, 솔로몬의 감옥, 키로스의 저택 등 화려한 건축술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러면 제국의 수도를 건설한 이 위대한 키로스 대왕은 누구인가. 그는 아키메네스조의 왕이 된 후 기원전 539년 주변국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페르시아를 세계제국으로 구축해 놓았다. 그는 유능한 전술가였으면서도 고결한 성품의 지배자였다는 명성을 후세에 남겼다. 관대하며 자비심이 많아 정복한 영토를 한 개의 통치철학으로 가두려 하지 않았다. 피지배민족들에게 관용 정책을 베풀고 토착세력이 지역 후계자가 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당시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였으나 각 민족의 종교를 인정해 주었다. 알렉산더 대왕도 이 정책의 영향을 받고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한번은 바빌로니아를 공략하고 유다 왕국을 점령했을 때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 있던 유다인들을 해방시킨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키로스 왕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이 사건에 대해 구약성서 '이사야서'에는 키로스를 고레스 왕으로 표기하고 목자이며 야훼께서 기름 부은 자로 찬양하는 내용도 있다. 대영제국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소위 '키로스의 점토판'은 피정복민의 학살을 금지하는 등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왕은 바빌론으로 무혈입성하면서 '평화를 원하기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노예제도를 금하노라'라고 선포했다. 이 내용이 당시의 문자로 새겨져 있으며 1879년 이라크 바빌론 폐허에서 발견됐었다.

페르시아는 역사적으로 크게 3번이나 정복되었는데 어느 시기에서도 이 묘는 파괴되지 않았다. 처음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존경해 허리를 굽혔고, 두 번째로 아랍인이 공격했을 때는 위대한 솔로몬왕의 묘라고 생각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세 번째 몽골 침략 시에는 폭염을 싫어한 몽골군이 남부지방까지 내려오지 않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왕조가 거듭되고 수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2천600년의 풍상을 견뎌온 것은 단단한 재질의 석회암이라는 이유만이었을까. 다민족 국가인 페르시아 제국의 융화를 위해 관용과 포용을 실천한 이상적인 군주로 긴 세월이 흘러도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높푸른 하늘 아래 당당히 서 있는 무덤과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을 본다. 위대한 키로스 대왕이 잠든 곳, 그 주위가 지금은 황량한 벌판에 놓여 있지만 당시에는 '파르가드'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왕의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곳에서 파라다이스라는 명칭도 유래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 승려들이 조용히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고 알렉산더를 수행해 이곳에 온 역사가는 기록하고 있다.

글'사진: 박순국(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sije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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