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통재라. 내 삼가지 못한 탓이로다. 무죄(無罪)한 너를 마치니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라.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오…."
19세기 유씨 부인이 부러진 바늘을 아쉬워하며 쓴 '조침문'(弔針文)의 한 대목이다. 바늘을 부러뜨린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니 누구를 탓하며 누구를 원망하겠느냐는 회한이 듬뿍 담겨 있는 대목이다.
"이번에 공직자의 처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들 절감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각 부처에서는 공직자가 국민 신뢰에 어긋나지 않도록 공직 기강을 확립해 달라."
박근혜 대통령이 14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밝힌 당부의 말씀이다. 박 대통령의 언급에는 방미 수행에 나선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일탈 행위로 인해 성공적이었던 미국 순방의 성과가 한순간에 뒷전으로 밀려난 데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 있다.
박 대통령은 전날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청와대 비서실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들에 대한 공직 기강 확립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윤 씨의 성추행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있고 수석비서관과 1급 비서관인 대변인 간의 갈등, 수석실 간에도 높았던 칸막이 등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비서실의 문제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런 면에서 윤 씨는 '청와대의 바바리맨'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얻었다.
사실 윤 씨의 성추행 사건은 미리 방지할 수 있는 장면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윤 씨는 박 대통령의 이른바 '1호 인사'였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내에서도 반대했고 그가 속했던 언론계도 반대하고 나섰지만 박 대통령은 윤 씨를 대통령직 인수위 대변인으로 깜짝 발탁했다. 이어 인수위에서도 '불통' 대변인으로 논란을 빚었지만 그를 청와대 대변인으로 기용하면서 신뢰를 보냈다.
청와대 대변인으로서도 그는 출입 기자들에게 낙제점을 받았지만 웬일인지 박 대통령은 두 명의 대변인 중에서 이번 방미 수행 대변인으로 그를 낙점했다. 그가 방미 수행단에 포함된 것은 그를 제외시켰을 경우 예상되는 소란을 피하겠다는 적당주의 때문이었다는 추측도 없지 않다.
그가 '시한폭탄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청와대는 미국에서도 '설마하면서' 그가 결정적인 사고를 칠 때까지 내버려둔 것이다. 박 대통령의 방미 행사에 참석한 후 프레스센터에 가서 충실하게 브리핑하지 않아도 그의 동선을 확인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수행하던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은 거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윤 씨가 제멋대로 행동했는데도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 데에는 박 대통령이라는 든든한 '빽'이 작용했다. 여권과 청와대는 물론이고 기자들까지 그가 찬 '완장'을 외면했지만 그는 대변인이라는 '완장'을 그의 위상을 잘 모르는 인턴 직원에게 휘둘러댄 것이다.
문제는 청와대 내 누구도 윤 씨의 이런 행각을 제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윤창중식 인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윤 씨를 기용한 자신의 인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 대통령의 잘못된 인사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통령의 인사권은 자신이 신뢰하거나 일 잘하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의 인사는 고도의 정치 행위다. 그래서 대통령의 인사에는 국정 철학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윤 씨의 대변인 기용에는 그런 정치적 고려가 보이지 않았다. 국민들 눈에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보수 논객으로 활약상을 펼친 것에 대한 보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이 좋아하고 신뢰하는 인사를 기용하면 그가 일을 잘하건 못하건 인사권자의 책임은 무한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윤 씨의 성추행은 그가 책임져야 할 돌출 사고지만 정치적 책임은 고스란히 박 대통령의 몫이다. 박 대통령은 윤 씨가 저지른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가 아니다. 공직자로서의 기본적인 품성조차 갖추지 못한 그를 그 자리에 앉힌 것은 인사권자인 박 대통령이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된 인사 스타일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진단을 받아들인다면 이제라도 인사 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인사 잘못에 대한 자기반성의 모습을 국민 앞에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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