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속의 시대 귀한 대접…'中古' 당당하게 부활

값싸고 새 것 같아 좋더라…새 소비문화 등장한 '중고 매매'

중고 서적 판매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중고 서적 판매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알라딘'.
교동시장에 중고 IT 골목이 형성되고 있다.
교동시장에 중고 IT 골목이 형성되고 있다.
현대식 중고 자동차 백화점,
현대식 중고 자동차 백화점, 'M월드'.
국내 최대 규모의 중고 디카 매장인
국내 최대 규모의 중고 디카 매장인 '쿨샷'.

'남이 쓰던 헌 것, 쓸 만큼 쓴 것, 줘도 안 하는 것.'

아무리 명품이라도 중고(中古)라는 딱지가 앞에 붙으면 신세가 처량해진다. '공짜는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중고는 '공짜'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하기 일쑤다. 요즘 같은 물질만능'황금만능시대에 중고는 그런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경기침체의 그늘이 이어지면서 중고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 무시당했던 중고가 귀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얇아진 지갑에 한숨 쉬는 서민들에게는 착한 가격과 품질로, 명품족에 기죽었던 멋쟁이들에게는 당당함을 선사하고 있다.

중고에 대한 편견도 사라지고 있다. 남이 쓰던 물건이라는 개념에서 값싸고 새것 같은 제품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중고품을 판매하는 대형 매장들이 잇따라 생겨나고 있고 온라인 판매 등도 늘어나면서 '중고 매매'가 새로운 소비 문화로 정착되고 있다.

◆불붙는 중고 매매

이달 14일 오후. 대구 서구 이현동에 있는 중고차 전문 백화점인 'M월드'. 지상 1층부터 6층까지 중고 자동차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때마침 여름휴가를 앞두고 새로 차를 장만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곳에서는 국산차부터 외제차까지 4천여 종의 차량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2011년 6월 개점 후 매매상사 수와 판매차량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한 달 평균 2천200여 대의 차량이 주인을 찾는다. 지난해 같은 기간 1천600대에 비하면 40% 가까이 판매량이 급증한 것. 이렇게 손님이 많은 것은 바로 저렴한 가격, 그리고 자동차 회사의 신차 출고가 올 들어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M월드 김재환 과장은 "몇천㎞ 정도 달린 고급 수입차의 경우도 출고가의 3분의 2 수준에서 구입할 수 있다. 게다가 올 들어 신차 출시가 늦춰지면서 중고차 매매를 원하는 고객들이 늘고 있다"고 했다.

지난 4월 대구 중앙로에 들어선 중고서점 '알라딘'. 대구 시민은 물론 인근 다른 지역에서도 일부러 찾아올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14일 오후 입구에 '오늘 들어온 책 2505권'이라는 표시가 반긴다. 매장 안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양쪽에는 유명 작가의 캐리커처와 함께 작품 속 명언들이 쓰여 있다. 대학 도서관을 연상시킬 정도로 엄청난 규모다. 도서 검색을 위한 공간도 있다. 검색을 통해 책의 위치는 물론, 책을 살 때와 팔 때의 가격을 미리 알아 볼 수 있다.

'아이의 가능성'이라는 책을 구입하기 위해 검색을 했다. 위치와 함께 5천800원의 가격이 정해졌다. 이 책의 원래 정가는 1만3천원. '책을 팔아볼까' 하는 생각에 소설 '칼의 노래'를 입력하니 5천700원에 팔 수 있단다. 가격은 수요에 따라 달라진다. 책 정가의 20∼30% 가격대에서 팔 수 있는데 최고 55%의 가격으로 파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장르별로 책을 분류하기도 하지만 6개월 신간, 고객이 방금 팔고 간 책, 역대 베스트셀러, 옆집 서재에 있던 책 등 중고서점만의 코너 구성도 독특하다. 특히 절판된 책을 파는 코너는 인기 만점이다.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개점 한 달 보름 만에 중고 서적과 CD 7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전상식 매니저는 "손님들이 서점에 판 책을 다시 손님들에게 되파는 구조다. 절판된 책이나 저렴한 책을 사기 위해 하루 1천 명 이상의 고객들이 몰린다"고 했다.

대학생 사이에서 중고 서적을 매매'교환하는 '알뜰족'도 늘고 있다. 등록금도 만만치 않지만 전공 서적도 비싼 것은 수십만원에 달해 큰 부담이다.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직접 중고 교재 장터를 마련했다. 영남대 교내에는 학생들이 마련한 중고 전공 서적 판매대가 마련돼 있다. 새 책 가격의 20~30% 수준으로 저렴하다. 대구대는 대학본부와 총학생회가 힘을 합쳐 중고 교재 활용에 적극 나서고 있다. 재활용품 상설 판매점인 'DU나눔가게-pum'을 통해 학생과 교직원들로부터 기증받거나 판매를 위탁받은 중고 서적과 교재를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 이곳은 2011년 11월 문을 연 후 학생과 교직원으로부터 기증받은 교재와 도서가 550여 권에 이른다. 학생들로부터 판매를 위탁받은 중고 서적은 120여 권이다. 총학생회에서도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 중고 서적 매매를 위한 북장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 대학 학생 김종구 씨는 "필기 흔적이 조금 있지만 새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좋다. 오히려 필기가 돼 있는 것이 학습에 도움이 돼 친구들 사이에 인기다"고 했다.

◆중고의 메카, 동성로

동성로가 중고의 메카로 떠올랐다. 15일 오후 찾은 동성로 '구제골목'. 명품 수입 의류를 비롯해 침구류, 베개 등 생활용품에서부터 골프용품, 액세서리 등을 판매하고 있다. 구제 옷들과 액세서리를 팔고 있는 가게만 200여 곳,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쩍 수가 늘어 '구제골목'이란 이름까지 얻었다. 특히 코리아나백화점에는 20여 개의 구제 전문 매장들이 밀집해 있다.

구제(舊製)는 옛적에 만든 물건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상인들은 중고 의류에 구제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한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를 전후해 동성로에 '구제'라는 간판을 단 중고 의류 판매점이 하나 둘 생기더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이들 가게는 각종 의류에서부터 모자'가방'신발'시계'스카프 등을 팔고 있다. 최근에는 입던 속옷까지 구제라는 이름이 붙어 팔린다. 일본과 미국에 있는 중고 의류를 수입해 판다는 곳부터 명품 가방'신발만을 취급한다고 간판을 건 곳도 많다. 값은 1천원대부터 몇만원대까지 천차만별. 수입 구제 물건을 파는 한 가게 주인은 "1년 전 이곳으로 이전했다. 불경기이지만 찾는 손님들이 늘고 있다. 최근에는 30, 40대 주부뿐 아니라 10대들도 많이 찾는다. 또 외국인 근로자들을 비롯해 관광객들도 많다"고 소개했다.

교동시장 역시 중고의 천국이다. 이곳은 디카나 노트북, 컴퓨터의 중고 매매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대구시청에서 동아백화점에 이르는 골목은 '구제 IT 골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여 개의 중고 매매 컴퓨터 업체가 성업중 이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거품이 빠진 가격. 중고 제품의 가격은 대략 신제품의 50% 선으로 부담이 없다. 새 제품이나 다름없는 물건이 많다. 바코드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중고 제품도 눈에 띈다.

중고 PC 매매 전문인 '고물창고' 염상현 사장은 "IT 제품의 경우 최신 기종을 찾는 노마드족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이 내다 판 고품질의 컴퓨터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 가격도 저렴해 온라인 구매가격에 비해 평균 20% 정도 저렴한 값으로 중고 컴퓨터를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2011년 개점한 중고 디지털카메라 매매점인 '쿨샷'. 노보텔 맞은편에 위치한 이곳에는 400여 대의 중고 디카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사장 조창석 씨는 "한강 이남에서 최대 규모다. 최신 디카를 시중가의 절반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디지털 기기는 사용한 기간에 비례해 제품의 수명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쓰던 것이라고 해서 큰 흠이 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글'사진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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