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2부-근대의료의 도입 <11>일제에 병원 운영권을 빼앗기

미국의 선교사 내쫓고 의료진은 강제 노역 동원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 동산기독병원에 있던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했다. 사진은 해방 이후 의사 선교사들이 다시 돌아와 진료하는 모습이다. 일제 말기 동산기독병원의 사진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계명대 동산의료원 제공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 동산기독병원에 있던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했다. 사진은 해방 이후 의사 선교사들이 다시 돌아와 진료하는 모습이다. 일제 말기 동산기독병원의 사진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계명대 동산의료원 제공

#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동산기독병원·애락원 침탈…일본인 경찰관 관리자로 앉혀

# 경영권 이관 서류도 얼렁뚱땅 의료 무관한 '보험협회' 기록…일본어 발음만 듣고 작성한 듯

일제 말기 의료계도 큰 변화를 겪게 됐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본격적인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문제는 전쟁 물자와 인력 조달. 이른바 총동원령을 내려 조선에 있던 모든 물자와 인력을 싹쓸이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의료계도 전시동원체제에 휩쓸리게 된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선교사 추방

동산기독병원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일제는 1941년 12월 8일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한 뒤 개전 조서(선전 포고)를 발표하고, 태평양전쟁(일본은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름)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일제는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사업체를 '적산'(敵産), 즉 적국의 재산으로 규정하고 접수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선교사들도 모두 추방했다.

이 무렵 상황은 극히 나빴다. 이미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는 조선에 있던 선교부에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이를 거부하면 교육사업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940년 말 종교법을 개정하면서 선교활동은 아예 불가능해졌다.

선교사들이 교실이나 성경학교에서 수업하는 것이 금지됐고, 선교사는 물론 선교사와 교류하는 조선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발각되면 경찰서에 불려가 협박을 받기도 했다. 서울에 있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병원에 있던 선교사들도 모두 추방됐고, 학교 이름도 총독부가 강제로 '아사히 의학전문학교'로 바꾸었다. 당시 동산기독병원 원장이던 플레처도 태평양전쟁 초기 부인과 함께 가택연금을 당했다가 결국 추방당해서 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고, 안이비인후과 장원용 교수가 임시 원장직을 맡았다. 아울러 미국에서 공부했던 내과 의사 황용운은 적성 인물로 분류돼 넉 달간 감금당하기도 했다.

◆동산기독병원 경영권 빼앗아

동산기독병원과 애락원(대구나병원)의 운영권도 경상북도 경찰부 소속 재단법인 경북공중보건협회로 넘어가게 됐다. 경상북도 경찰부는 동산기독병원 이사회에 압력을 넣어 강제로 '동산기독병원과 애락원의 경영권 일체를 재단법인 경북공중보건협회에 무조건 양도한다'는 결의를 하도록 했다. 그런 뒤에 1943년 4월 30일 열린 제41회 경북노회 임시노회에서 친일파 대구교계 지도자들을 앞세워 앞서 이사회 결의를 승인하도록 만들었다. 경북노회를 해산하는 마지막 노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경북노회가 동산기독병원 이사회 결의를 승인하는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분명히 이사회 결의문에는 경영권 일체를 넘겨받는 주체가 '재단법인 경북공중보건협회'로 돼 있는데 노회 승인 과정에서 '재단법인 보험협회'로 바뀌어버렸다. 전혀 성격이 다른 기관들이 경영권을 넘겨받는 주체로 명기된 셈이다. 이런 일이 생긴 이유에 대해 '동산의료원 100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짐작하기에는 보험협회와 보건협회의 일본어 발음이 같은 데서 생겨난 해프닝으로 생각된다. 두 낱말의 일본어 발음은 다 같이 '호갱교가이'다. 동산기독병원 이사회나 경북노회 서기가 경찰의 무서운 압력에 질려서 앞뒤 따져볼 정신이 없었든지 아니면 일본어 실력이 매우 낮은 수준이었든지 어느 하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동산의료원 100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다시 밝혀졌다. 1943년 4월 경북노회를 통해 동산기독병원과 애락원이 일제 관리로 넘어가기 약 6개월 전에 이미 재산관리권이 넘어간 상태였다는 것. 등기부상 기록에는 '1942년 11월 10일 자로 적산관리인 재단법인 조선경찰협회 경상북도지부 후원회(대구부 상정(上町) 24번지) 등기'로 나와 있었다. 앞서 주소는 경북도 경찰부가 있던 도청 건물의 지번으로, 현재 경상감영공원으로 바뀐 중구 포정동 24번지를 말한다.

◆병원 직원, 의학도까지 강제 노역

이렇게 경찰부가 동산기독병원을 접수한 뒤 경찰관들이 속속 관리자로 임명됐다. 당시 애락원 의무과에 있던 직원인 손병한의 회고 중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경찰부 후루야는 그 밑에 모리라는 일본인 부장과 박모라는 조선인 순경을 거느리고 왔다. 후루야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칼을 차고, 매일 병원에 와서 안하무인격으로 거들먹거렸다.'

원장직은 일본인 나카다(中田薰)가 차지했고, 사무장에는 야마모토(山本)가 앉았다. 특히 야마모토는 철저한 천황사상과 식민지 관료의식이 철저했던 모양이다. 당시 동산기독병원 소아과 의사 손영규의 기록에 따르면, '(야마모토는) 부원장(안과 의사 장원용) 이하 모든 직원은 출근 즉시 자기 책상 뒤에 있는 천황 유시(백성을 타일러 가르치는 천황의 글)를 향해 최경례(허리를 90도까지 굽혀서 하는 큰절)를 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은 야마모토 자신에게 큰절을 하라는 꼴이 됐다.'

실력도 없이 거들먹거리는 일본인 의사들은 꼴불견이었다. 산부인과 과장에 부임한 일본인 의사 나카가와(中川)는 병원 내 근무하는 조선사람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고, 풍만 셌을 뿐 의술은 수준 이하였던 모양이다. 의사 손영규의 기록에 이렇게 적혀 있다. '풍쟁이 나카가와는 이종수(외과) 선생을 조수로 쓰며, 명집도(名執刀)를 한답시고 수술 구경을 오라고 뻐겼다. 호기심에 가보았더니 장 유착(장끼리 또는 장과 다른 조직끼리 달라붙은 것) 부분을 칼끝으로 긁적긁적 별리(떼어내는 것)하다가 그만 장이 터져서 내용물이 쏟아져나와 구린내가 났다. (수술을 받은) 환자는 그날 밤 사망하고 말았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패색이 짙어지자 일제는 발악을 시작했다. 아침 조회 시간에 병원 직원들을 현관 앞에 일제히 세워 동방요배(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천황이 사는 동쪽 즉 일본 쪽을 향해 고개 숙여 절하는 것)를 시킨 뒤 두 명씩 한 조가 돼 흙 옮기는 작업을 시켰다. 빡빡 깎은 머리에 전시복을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각반을 감았다.

이런 일은 병원 직원에게만 해당한 것은 아니었다. 의학전문학교 학생들도 머리를 빡빡 깎은 채 '근로봉사대' '건설봉사대'라는 이름으로 방공호 작업장이나 토목 공사장, 비행장 건설 공사 등에 동원되기 일쑤였다.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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