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그네야 날아라

일전 경당고택에 들렀습니다. 안동 서후면에 있는 경당고택은 17세기 후반 한글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계향의 친정집입니다. 70여 년 전에 옮겨 새로 지었지만 그 집 마당에 들어서면 어딘지 모르게 고아한 향훈이 배어납니다. 누대를 살다간 선인들의 내음이 집안 구석구석에 스며 밴 까닭이겠지요. 탱자꽃이 하얗게 핀 대문간을 지나 뒤뜰로 들어서면 더 푸른 청솔밭의 굽은 솔가지에 묶인 긴 그네가 눈에 띕니다. 그네는 살가운 봄바람을 싣고 옥색 너울 속으로 흔들흔들 춤을 춥니다. 찬란한 오월의 아침 햇살 사이로 그 옛날, 총명했던 어린 계향의 모습이 얼핏 그려집니다.

하얀 이팝꽃 무리가 눈더미처럼 흘러내리면 서럽도록 붉던 참꽃을 저만큼 물러서게 한 산은 서서히 푸르름으로 채워나갑니다. 그러나 신록이 꽃보다 아름답다 노래할 사이도 없이 또다시 산은 붉고 굵직한 송화 대궁이를 쑥-내 밉니다. 솔향이 산자락과 고택의 뒤뜰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유소년기 시절 나도 마을 당나무에 길게 매인 그네를 타본 적이 있습니다. 힘주어 발을 굴리면 내 몸은 가지런하게 자란 보리밭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듯하다가 높은 구름 속으로 떠나는 짜릿함을 느끼곤 하였지요. 놀잇감이 다양하지 않던 그 시절의 그네 타기는 요람과 같은 안락감과 아슬아슬한 긴장감은 물론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달아주었지요.

앞산이 짙푸르러 가던 단오절이면 이웃집 누나들도 주저하지 않고 그네에 오릅니다. 마을 잔치인 추천대회(그네뛰기)에서는 누가 더 멀고 높이 뛰는가에 온 눈길이 모이곤 하지요. 그네를 타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다 함께 짜릿한 신명을 느낍니다. 그네에 오른 봄처녀는 자신의 속옷이 드러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쳐다보는 이들의 눈길이 휘둥그레지곤 했지요. 자기 몸매를 자유롭게 드러내지 않던 그때는 단오절의 세시풍속이던 그네뛰기가 아낙들의 공인된 드러냄의 유희이기도 하였습니다.

18세기 중엽, 프랑스의 프라고나르는 선정적이고 농기에 찬 그림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불후의 명화로 손꼽히는 '그네'는 아리따운 여인이 속치마를 펄럭이면서 그네를 타는 모습과 그 아래 숲을 가리고 여인의 속살을 엿보는 듯한 개구진 표정의 사나이…. 그 속에서 그네를 굴리는 여인의 표정은 마냥 경쾌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하늘을 날고 싶어 한 인간의 욕망은 참 오래된 일이지요. 땅을 떼고는 한 걸음도 나설 수 없는 사람의 원초적인 욕망을 그네가 해결해 준 것은 아닐지요. 두 개의 밧줄에 의지하면서 공중을 나는 순간 생래적으로 희원해 온 비상의 꿈을 펼치는 순간이 되었을 테니까요. 인간은 갓난아기 때부터 그 어떤 세상보다 더 넓은 어머니의 배 위에서 그네타기를 경험합니다. 어머니가 잡아주는 두 손에 매달려 그네를 타다 그만 포근한 그 배에 엎디어 곤히 잠들곤 하지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육아법으로 알려진 단동십훈(檀童十訓)에도 아이를 어루던 내용들이 보입니다. '도리도리, 지암지암, 곤지곤지, 작작궁 작작궁, 질라아비훨훨의….'여기서 질라아비훨훨의는 공중으로 뜨면서 춤을 추는 행위입니다. 어른이 자신의 배 위에 아이를 얹거나 또는 아이의 양쪽 겨드랑이를 잡고 앞뒤로 높이 띄우는 동작이지요. 부모로부터 이격되는 불안감과 긴장감에 자지러지는 아이지만 공중이라는 낯설고 불안한 세계를 향하는 독립 행동을 처음 경험합니다. 아마도 우리 선인들은 그런 놀이에서 도전과 상상력, 자신감을 키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참으로 다양한 놀잇감이 있습니다. 각기 취향에 따라 즐깁니다. 그런데 너무나 디지털놀이에 편향된 듯합니다. 잠시라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기라도 하면 불안감이 없지 않습니다. 자꾸만 자연과 멀어져갑니다. 사람과 자연, 그리고 그 속에 인간의 지혜와 감성이 담긴 유희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 옛날 그네를 뛰면서 훌쩍 담 너머도 훔쳐보고, 먼 산모롱이도 눈 아래 넣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여유를 부려보는 놀이는 인간의 물리적 욕구와 심리적 욕구의 충돌을 완충시켜 주는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비록 육체적인 수고로움이 뒤따르고 지극히 아날로그적 놀이일지라도 유희를 즐기면서 또 다른 자기를 발견하는 기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정식/담나누미 스토리텔링연구원장 gangsan3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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