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성률의 줌 인] 'Before' 시리즈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삶의 조각이 모여 인생이 된다

2013년 작
2013년 작 '비포 미드나잇'
1995년 작
1995년 작 '비포 선라이즈'
2004년 작
2004년 작 '비포 선셋'

이런 시리즈가 또 있었던가? 아마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것 같다. 1995년 '비포 선라이즈'가 만들어졌을 때 일회성 영화인 줄 알았다. 이별의 아픔을 달래려 혼자 여행하다가 유럽횡단 열차에서 우연히 프랑스 여인 셀린느를 만나 스위스 빈에서 꿈같은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름다웠다. 섹시한 에단 호크와 우아한 줄리 델피의 모습도 이런 판타지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달콤한 하룻밤을 보낸 뒤 헤어지면서 6개월 뒤 기차역에서 재회하자며 영화는 끝이 난다. '과연 그들은 실제 만났을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거짓말 같은 일이 발생했다.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같은 감독이 같은 배우를 기용해 무려 9년 뒤인 2004년에 '비포 선셋'을 만든 것이다.

빈에서의 하룻밤 낭만을 소설로 써 유명 작가가 된 제시가 프랑스 서점에서 관객과의 만남을 가질 때, 셀린느가 찾아온다. 두 사람은 제시가 비행기를 타야 하는 저녁(선셋)까지 파리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눈다. 제시는 그 사이 결혼해서 아이가 있고, 셀린느는 환경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할수록 둘은 서로를 그리워했음을 알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셀린느가 제시를 위해 지은 노래를 들려준 뒤 빨리 떠나라고 한다. 영화는 막을 내리지만, 여전히 제시가 떠났는지, 만약 떠나지 않았다면 둘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다시 9년 뒤. '비포 미드나잇'이 등장했다. 여전히 같은 감독과 같은 배우. 제시는 셀린느와 결혼 해 딸 쌍둥이를 두었고, 전처 소생의 아들은 전처가 키우고 있다. 영화의 시작은 그리스의 공항에서 아들을 미국의 전처에게 보내는 장면이다. 가족이 그리스의 해변에서 6주의 휴가를 보내고 마지막 시간을 갖는 것인데, 아들을 먼저 보낸 제시는 심사가 복잡하다. 화려한 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왔지만 결국 둘은 싸우고 만다. 그동안의 불만이 터져 나와 되돌릴 수 없는 말의 상처를 주고받은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될까? 이제는 40대가 된 줄리 델피는 살이 많이 쪘고, 에단 호크는 얼굴에 주름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이 시리즈가 매력적인 것은 20대와 30대, 40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풋풋하고 아름답고 섹시한 20대의 하룻밤 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그러나 30대의 모습은 조금씩 현실적으로 되어간다. 20대의 기억을 간직한 채 현실 속에서 살지만 만족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이상을 포기하지도 못한다. 이런 상태에서 서서히 나이 먹는 자신을 지켜봐야 한다.

40대가 되니 현실적인 문제들이 사랑의 무게를 짓누른다. 아이의 양육과 직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셀린느, 셀린느의 불만을 받아주면서 전처와 아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제시의 모습은 우리네 40대와 다르지 않다. 실제 늙어가는 모습을 영화 속에 그대로 보여주는 배우들의 모습에서 이런 것은 더 강하게 작동한다.

독학으로 영화를 공부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이 시리즈를 만들면서 특이한 원칙을 세운 것 같다.

첫째, 두 인물의 대사 장면을 최대한 편집 없이 화면에 그대로 재생하는 것. '비포 미드나잇'의 둘째 시퀀스에서는 10분이 넘는 롱테이크가 이어진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아내, 두 딸과 자동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그 시간, 그 느낌을 편집 없이 그대로 스크린에 살려놓았다. 그 덕분에 대단한 고집이 만들어낸 현실적 풍경을 관객은 고스란히 구경할 수 있다.

둘째, 두 인물의 회상 장면을 절대 영화 속에 넣지 않는 것. 이런 영화는 대부분 과거의 아름다웠던 장면을 회상하고 추억하면서 현실의 아픔을 잊으려 하는데 그런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철저히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셋째, 치열한 대사를 통해 모든 상황을 만들어가고 풀어가도록 했다. 둘이 기차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40대가 되어 결혼 생활을 하면서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마치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수다쟁이들이다. 20대에는 아버지 세대에 대해 비판도 하고, 30대에는 환경문제를 두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가, 40대에는 자연스럽게 아내와 남편의 입장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 그 치열한 말의 상찬이 이 영화의 매력 가운데 하나다. 어쩌면 말을 그렇게도 잘 하는지!

어쩌면 '비포 미드나잇'은 슬픈 영화일 수도 있다. 40대에 접어든 인생의 고단함이 치열한 말싸움 속에 드러난다. 제시와 셀린느는 자신의 입장에서 서운한 감정을 폭발시키듯이 다 토로한다. 어떤 장면에서는 감독이 통제하기보다는 배우들이 스스로 역할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 상처를 그대로 응시하면서 그들은 또 살아간다. 그것이 과장되거나 아름답게 포장되지 않아서 좋다. 살다 보면 그런 상처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 삶인데, 많은 이들은 이겨낸다. 이 덕분에 둘 사이에 흐르는 애정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이 시리즈가 9년 뒤 다시 만들어지길 고대한다. 50대가 된 이들의 생생한 모습을 확인하며 그들과 함께 늙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인다. 영화가 삶의 동반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 시리즈가 증명해 주면 좋겠다.

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rosebud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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