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갯소리 한 자락이 얼핏 떠오른다. 간통죄로 법정에 선 유부녀에게 판사가 '네 죄를 네가 알겠지'하는 투의 말을 하면서 엄한 벌을 내렸다. 그 아낙이 하는 말이 가관이다. "판사님, 제 몸에 붙어 있는 것은 제가 맘대로 해도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정부에서 관리합니까"라고 항변했다고 한다. 김태희나 이효리에게 무지렁이 남정네가 열 번 찍을 도끼를 들고 쫓아다니면 그것도 문제일 것 같고 곧 성사될 사랑이 삼세판 커트라인에 걸려 좌절된다면 그것 또한 억울한 일이다.
나무도 나무 나름이지만 도끼도 도끼 나름이다. 도끼는 자르는 도끼(ax)와 패는 도끼(splitter)로 구분된다. 자르는 도끼로 패려고 달려들면 안 되듯 자신의 인품과 수준에 맞게 나무를 정해야 한다. 그러나 '포기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란 말이 있듯이 '사랑은 쟁취하는 자의 몫'이니까 불도저 같은 용기도 때론 필요할 것 같다.
10여 년 만에 전라도 고창에 갔다. 읍내 인근에 펜션을 정하고 저녁 준비를 위해 전통시장에 들렀다. 장날이 아니어서 그런지 어물전 생선들은 모두가 우중충해 보인다. 피꼬막과 피조개를 각 1만원어치씩 사고 물오징어 한 마리를 3천원에 샀다. 송송 썰어 조개 밥을 지을 참이다. 조개 밥은 양념간장만 있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여행 도반들의 전투식량이다.
옛 어른들도 장에 가면 간 갈치만 사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장 구경이 주목적일 때가 더 많다. 그래야 사돈도 만나고 친구도 만나 막걸리 사발을 기울일 테니까. 장보기를 끝내고 고창 읍성을 한 바퀴 돌았다. 돌담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초가지붕을 덮고 있는 소담한 동리(桐里) 신재효의 소리청이 보인다. 문득 200여 년 전 그 소리청 안에 있었던 애절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떠오른다.
동리는 1812년 고창에서 관 약방을 하던 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재산을 모은 아버지 신광흡은 자식만은 중인을 벗어나 양반의 신분으로 바꿔주고 싶었다. 뒷돈을 주고 아들을 호남 최고 서당인 필암서원에 학동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신분 조작 사실이 탄로 나자 신재효는 몰매를 맞고 쫓겨나고 만다.
동리는 벼슬하기에 평생을 거느니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소리에 생애를 바칠 각오를 하고 뛰어든다. 그는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소리꾼들을 만나 우리 가락을 귀로 듣고 온몸으로 느낀 후 집으로 돌아온다. 38세 되던 해 그는 선친의 약방 터에 소리청을 열고 전국에서 모여든 50여 명의 문하생을 기숙시키며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 진채선이란 낭자가 소리청에 들어오게 된다. 채선은 아비가 또랑광대였고 어미는 무당이어서 어릴 적부터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귀동냥으로 듣던 소리를 스승의 가르침 속에 익히자 얼마 가지 않아 최고 명창 대열에 오르게 된다. 부인과 사별한 동리는 57세까지 독신으로 지냈으나 채선의 소리와 몸이 한층 야물게 익어가자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고종 4년 경복궁 낙성식이 열리게 되자 조정에선 전국의 명창과 재인들을 불러들여 조선조 최고의 열린음악회를 열었다. 동리는 채선을 소리청 대표로 한양으로 보내면서 여색질의 명수인 대원군의 음흉한 심보를 염려하여 남장 차림새로 보냈다. 채선이 이날 공연에서 '청조가'와 '방아타령'을 열창하자 대원군은 첫눈에 빠져들었다. 대원군은 갸름한 얼굴에 나긋나긋한 몸매, 그리고 천부적인 목소리를 지닌 어린 낭자를 그냥 놓아 줄 리가 없었다.
채선은 이날부터 최고 권력자인 대원군의 애첩이 되어 운현궁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연인을 잃은 동리는 사랑을 속삭이던 방을 검은색으로 도배하고 칠흑 같은 고독의 심연 속에서 채선을 그리워하다 생을 마쳤다고 한다. 스승이 살아 있을 적에 채선은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연인인 동리를 찾아왔으나 차마 대문을 밀치고 들어가지 못하고 담벼락을 쓸어안고 울다 돌아섰다고 한다. 그래, 사랑은 아픈 것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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