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지는 천조각은 예쁜 레인코트가 된다. 못 쓰게 된 천막은 멋진 가방으로 변신한다. 낡은 가죽 재킷은 알록달록 필통으로 거듭난다. 이쯤 되면 재활용을 넘어 가히 '발명'이라 부를 만하다. 패션'디자인산업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는 '업사이클링'(up-cycling)의 마술이다. 마침 대구에서는 재활용 디자인 체험전도 열리고 있다. 이참에 '개념' 있는 소비자가 한번 되어보는 건 어떨까?
◆지구와 환경을 생각하는 업사이클링
"디자이너는 사회적, 도덕적 책임감을 의식해야 한다. 디자인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의 정신적 가치를 부각시키면서 생태적 균형을 전제로 한 디자인의 실현을 강조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1927~1998)이 남긴 말이다. 업사이클링은 그런 점에서 디자이너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다.
업사이클링은 폐기물에 상상력과 디자인을 접목한다. 폐품을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보다 한 단계 진보한 개념이다. 버려지는 재료에다 생명을 불어넣어 더 가치 있게 쓰도록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유명 브랜드도 다수 등장했다. 못 쓰는 트럭 덮개, 자동차 안전벨트를 이용한 가방으로 유명한 스위스 업체 '프라이탁'(Freitag)은 전 세계 350여 개 매장에서 연간 500억원어치가 팔린다. 영국 리폼 브랜드 '원 어게인'(Worn Again)은 항공기의 낡은 좌석 커버, 자전거 타이어, 낙하산 등을 패션 소재로 활용해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에 비하면 국내 업사이클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다. 하지만 관심을 갖는 소비자가 차츰 늘면서 관련 기업도 잇따라 탄생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대기업 브랜드도 시장 참여를 선언하고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대구에서는 재단법인 대구경북디자인센터의 '더나누기 프로젝트'(www.thenanugi.or.kr)가 대표적이다. 지역 섬유업체에서 상품을 생산하고 남은 자투리 원단을 재활용, 가치 있는 핸드메이드 디자인 상품으로 재탄생시키고 있다. 대구경북에서 1년에 버려지는 잉여 원단은 약 760㎞(83만 야드), 50억원대에 이른다는 점에 착안한 아이디어다.
지난해 2월부터 현재까지 지역 섬유업체 30여 곳으로부터 기부받은 잉여 원단은 약 73㎞(8만 야드). 손수건'스카프 전문 제조회사인 서도산업은 손수건 2만 장을 기부해 왔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원단 제작 비용만 약 5억원이 넘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환경비용 절감 효과는 그 이상이다. 원단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원단 소재인 목화나 마 재배 시 사용되는 화학비료'농약 사용을 줄여 대기'토양보존 효과를 거뒀다. 원단을 소각할 경우 발생하는 처리비용과 환경오염을 원천 예방한 셈이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착한 비즈니스'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시니어클럽 등 취업 취약계층이 생산을 맡는데다 판매 수익의 일부는 어려운 이웃에게 다시 기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일자리 창출, 사회안전망 강화, 환경 보호라는 일석삼조의 효과다. 여기에다 디자인과 상품 기획은 센터 내 전문인력뿐 아니라 대구가톨릭대'경일대 등 지역 대학, 민간 디자인회사의 재능 기부로 이뤄져 더욱 눈길을 끈다. 디자인센터 이경남 일자리창출팀장은 "기부받은 원단으로 슬리퍼, 레인코트 등 80여 종, 4만 개의 제품을 생산해 6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며 "뉴욕현대미술관 등 해외 진출도 가시화되고 있어 사업 전망이 밝다"고 했다.
◆취지 공감하는 마니아층도 형성
버려지는 자재들이 자연 상태에서 완전히 분해되는 기간은 무척 길다. 종이는 2개월에 불과하지만 담배 필터는 10년, 일회용 기저귀는 100년, 알루미늄 캔은 500년이나 된다. 유리병은 분해되는 데 무려 1천 년이 걸린다고 한다. 지속가능(sustainable)한 디자인이 절실한 이유다.
그러나 폐가죽과 헌 옷, 폐현수막 등을 이용해 만든 업사이클링 제품을 싸구려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재활용인 만큼 소재값이 덜 들어 가격이 저렴할 것이라는 선입견은 가격표를 보는 순간 여지없이 깨진다. 스위스 프라이탁 가방은 수십만원을 호가하고, 재단법인 '아름다운 가게'가 2007년 출범시킨 '에코 파티 메아리'의 가방 역시 재료에 따라 3만9천(타폴린 방수포)~6만9천원(양복지)에 이른다.
재료를 수거해서 분류하고 세탁'재단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다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제작 프로세스 역시 일반 제품처럼 디자인을 먼저 구상한 뒤 자재를 구하는 게 아니라 수거된 자재에 맞춰 디자인 방향을 결정한다. 아직 시장이 작아 대량 생산이 힘들다는 점도 한몫한다.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디자인에 이야기를 입히고, 환경보호라는 착한 이미지까지 더해지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마니아층도 형성되고 있다. 일부 연예인들의 경우 국내 업사이클링 브랜드의 옷을 즐겨 찾는 것으로 알려져 대중소비 확산에 기여하고 있기도 하다. '아름다운 가게' 대구 남산점의 김효원 매니저는 "며칠 전에 15만원짜리 가죽 가방을 사가신 분도 계시는데 가격보다는 제품 취지에 공감하기 때문"이라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상품이라는 장점이 개성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의 발길을 이끄는 것 같다"고 했다.
디자인은 우리 삶을 좀 더 편리하고 윤택하게 해주는 수단이다. 동시에 사회 변화를 이끄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유명 패션디자이너인 최복호 ㈜씨앤보코 대표이사가 버려지는 천으로 만드는 핸드메이드 인형도 그런 취지에서 시작됐다.
이 회사는 인형 입양을 통한 기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후원자가 인형을 입양하면서 낸 기부금(7만원 이상)을 발달장애인을 돕는 단체인 (사)퀄리라이프 부설 돋움공동체에 전달한다.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70명의 회원이 가입했다. 최 대표는 "우리 사회에 수만 명의 발달장애인이 있지만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어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들의 삶까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며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책임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궁금하면 '착한 디자인 공작소'로
2011년 정부의 지역 맞춤형 일자리창출사업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더나누기 프로젝트'의 상품들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착한 디자인 공작소' 전시회(5월 3일~6월 8일'문의 606-6136)에 가면 직접 볼 수 있다.
전시회 기간 중에는 평소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히트상품인 짝짝이 패션 슬리퍼는 7천원, 아웃도어 원단으로 만든 레인코트는 1만원, 손수건으로 만든 서류 파우치는 3천원으로 대부분 상품이 1만원 이하이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디자인 교육 이벤트도 진행돼 자녀에게 창의성'환경 의식을 키워주고 싶은 부모들이라면 한 번 가볼 만하다.
대구문화예술회관 박민영 학예연구사는 "윤리적인 디자인이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며 "눈과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지역의 착한 디자인 제품들에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전시회는 업사이클링 디자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폐현수막을 활용해 제품을 제작하는 '터치포굿', '아름다운 가게'의 업사이클링 브랜드인 '에코 파티 메아리' 등 국내 브랜드뿐 아니라 스위스 '프라이탁' 제품도 만날 수 있다. 전시실 옆에는 관람객들이 폐현수막 가방 만들기 등을 해볼 수 있는 체험장이 마련돼 있다.
전시장에는 관람 행렬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다. 서류 파우치를 고르던 직장인 김소정 씨는 "천으로 만든 제품들이라 피부에 거부감이 덜할 것 같다"며 "실용성이 돋보이는 제품들이 많아 고르기가 힘들 정도"라고 했다. 또 딸과 함께 전시장을 찾은 김선경 씨는 "평소 지속가능한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서 오게 됐다"며 "아웃도어 원단으로 만들었다는 레인코트들이 색깔도 아주 예뻐 딸에게 사줄 생각"이라고 했다.
지역의 디자이너와 예술가'디자인 전공 대학생들이 폐품을 활용해 만든 작품들도 전시돼 있다. 이 가운데 낡아서 못 쓰게 된 자전거 100대로 만든 손파 씨의 '리사이클'은 규모에서 관객을 압도한다. 지지대에 자전거를 용접해서 설치했으며, 실내 용접작업은 문화예술회관 개관 이후 처음이라는 게 문예회관 측 설명이다. 또 박병철 대구예술대 교수의 '새' 조각은 낫과 펜치 등 폐공구'농기구로 만들었으며, 계명대 김윤희 교수의 '블루밍 테이크아웃 컵'은 커피전문점에서 흔히 쓰는 일회용 컵을 꽃병으로 재탄생시켰다. 강형구 경일대 교수의 파운드 오브제 작품은 솥뚜껑을 테이블로 활용한 새로운 해석이 돋보이고, 오창린 동국대 교수의 파티션 작품은 폐비닐조차 훌륭한 예술품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아크릴과 골판지로 만든 '리싱킹'(rethinking)을 출품한 임헌우 계명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는 "사람과 환경을 위한다는 것은 디자인의 참다운 목적"이라며 "환경보호를 실천한다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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