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화폐와 정치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 통화량을 생산량보다 더 빠르게 증가시키지 않는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인플레에 대한 밀턴 프리드먼의 유명한 정의다. 명쾌하지만 2% 부족하다. 화폐적 현상은 자동적으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인플레는 국가의 정치 경제가 오작동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폐적 현상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현상'이다.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단명했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그 생생한 예다. 인플레가 최고조에 달했던 1923년 말 통화량은 4.97×10 마르크, 인플레이션율은 1천820억%, 1913년 대비 평균 물가는 1조 2천600억 배나 됐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나마 돈을 찍어낼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물리적' 한계상황에 봉착한 나라도 있었다. 재정 및 통화 정책의 실패로 돈을 찍어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1989년의 아르헨티나가 그 경우다. 그해 4월 28일 중앙은행 부총재 로베르토 에일바움은 기자회견에서 "돈이 바닥났다. 이는 물리적인 문제"라고 했다. 조폐국 인쇄기를 얼마나 빨리 돌렸던지 돈을 인쇄할 종이가 떨어진 것이다.

이 같은 화폐의 타락은 국가와 사회의 붕괴를 낳는다. "화폐를 타락시키는 것만큼 사회의 기초를 확실하게 뒤엎는 수단은 없다." 케인스의 명언이다. 이는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레닌의 말에서 얻은 통찰이라고 하나 레닌이 실제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볼셰비키 내 좌파로 천재 경제학자로 불렸던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이렇게 말한 것은 확실하다. "지폐 인쇄기는 부르주아 시스템의 후방에서 화염을 난사하는 금융위원회의 기관총이다."

일본 아베 정권의 양적 완화에 균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 경기 하락에 대한 우려와 일본 장기 국채의 금리가 치솟으면서 일본 증시가 13년 만에 최대로 폭락했다. 공교롭게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붕괴를 예측해 대박을 터뜨린 카일 배스 헤이맨캐피털 대표가 "감당할 수 없는 빚은 결국 디폴트(지급 불능)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2년 내 일본 국채의 폭락(금리 상승) 가능성을 예고한 직후다. 양적 완화가 디플레이션을 치유하는 영약일지 아니면 엔화를 타락시킨 정치적 현상일지 판가름날 시간이 머지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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