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찔레꽃

# 찔레꽃 -김명자(1954~)

언니야

찔레꽃 피었다

나물 캐던 밭 언덕

첫사랑 꼴머슴과 소원 빌던 당집 앞

눈찌 곱던 그 얼굴 희미해지는데

꽃은 어쩌자고 저리 곱게 피는지

언니야

저 눈물 꽃 피우려고

열일곱 봄밤에 그토록 울었나

차마 깨치지 못해 품고 간 첫사랑도

입고 간 삼베 적삼도

이제는 다 삭아졌겠지

언니야

찔레꽃 피었다

-시집 『시비걸기』(심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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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 「오월」에서 나는 "흰 꽃 많은 오월/ 이팝나무, 불두화, 아카시아, 찔레꽃"이라고 쓴 적이 있다. 우리나라 오월은 참으로 흰 꽃의 시절로 눈부시다. 곧이어 감꽃, 밤꽃들도 희게 줄을 잇는다. 붉은 불의 계절인 오월이 희디흰 가을의 금의 기운을 품어 흰 꽃을 피우고, 흰 금의 계절인 가을에 가서 붉은 오월의 불의 기운을 모아 붉은 열매 익는다. 여름이 가을을 닮은 꽃을 달고 가을은 여름을 닮은 열매를 단다는 말이다. 화극금(火剋金), 극하는 것을 다만 극하지 않고 품어 꽃으로 열매로 살리는 것이 자연 이치다. 사람들만 잘 모를 뿐이다.

찔레꽃은 사계절을 산다. 사람은 적지 않은 사계절을 경험하며 산다. 꽃은 때 되면 돌아오지만 같이했던 사람은 보이지 않기 일쑤다. 많은 시인이 꽃에 사람의 얼굴을 그려 넣는 버릇도 다 그런 탓이다. 올해도 찔레꽃이 피었다. 누구의 얼굴이 일렁이는가, 다시 보게 되는 것도 다 그 탓이다. 가을엔 붉은 열매, 찔레꽃 눈부신 오월이다.

안상학<시인·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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