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병원장과 경북대 의과대학 학장을 역임한 의사 박희명은 대구의 콜레라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1944년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콜레라 창궐 당시 대구의과대학 부속병원 부의무관(수련의)으로 있었다. 그의 회고담은 2005년 발간된 책 '8'15의 기억'(부제: 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 한길사)에 '수련의 시절 대구 콜레라 현장을 누비다' 편에 나와 있다. 콜레라 환자 치료를 위해 그해 6월부터 '대구부립 회생병원'(현 대구의료원)에 파견 근무를 나간 이야기를 살펴본다.
콜레라 환자는 탈수로 3, 4일 만에 체중이 15~20㎏이나 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환자 배설물은 쌀뜨물 같았고, 악취는 별로 없었으나 양이 엄청나서 병실이나 바닥이 온통 절벅절벅했다. 이 때문에 항상 장화를 신어야 했다. 심한 탈수 때문에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온몸에 주름살이 생겨 마치 노인처럼 보였다. 박물관에서 본 이집트 미라 같기도 했다.
당시 치사율은 거의 100%였다. 이유는 치료에 필수적인 수액제가 병원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약품도 거의 바닥나 있었는데, 먹는 약은 아무리 많아도 계속 토하는 탓에 무용지물이었다. 치료는커녕 용태만 파악했다. 수액제는 가물에 콩 나듯 미군들이 가져다주는 약에 의존했다. 다소 공급이 나아진 뒤에야 사망률이 70~80% 정도로 낮아졌다. 회생병원에서 진료한 환자는 2천 명가량인데, 여름이 지나고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환자 수가 갑자기 줄었다.
다른 전염병은 숨기려는 경향이 강한데 콜레라 환자는 가족뿐 아니라 인근 주민들까지도 자진해서 파출소에 환자 신고를 했다. 누구도 내 집이나 이웃에 환자를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신고를 하면 경찰관이 나와서 환자를 병원에 보내고, 집 주위에 새끼줄을 치고 소독약을 뿌린 뒤 출입을 금지했다. 환자가 병원에 올 때엔 덮개도 없는 트럭 바닥에 짐짝처럼 실려 왔다. 보호자는 전염도 두렵고 경찰관 제지도 있고 해서인지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환자가 죽어도 가족들이 시체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환자들은 올 때도 트럭, 죽고 난 뒤에도 트럭에 실려서, 단 한 명의 가족도 없이 화장터로 갔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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