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문학회에서 테마 문학 기행으로 지난해 강원도 원주의 박경리 문학관을 찾았고, 올해는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경상남도 하동의 평사리를 찾았다. 4월의 하동은 재첩을 잡는 어민과 섬진강 모래밭을 타고 흐르는 강의 고요와,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온갖 풍상을 견디며 토우처럼 엎드린 지리산의 깊은 침묵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우리를 맞이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최참판댁 정자에서 악양 들판을 바라보며 해설사는 소설 '토지'에 나오는 주인공과 등장하는 주변 경치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작가의 삶과 문학을 생각하며 짧은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선생은 일찍이 이념 갈등으로 남편을 잃었고, 홀로 딸을 키우면서 모진 풍상을 견뎠다. 사위는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의 옥바라지를 하며 지켜보는 데 또 한 세월을 보냈다.
박경리 선생이 고통의 계곡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신념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운명과도 같은 가정사의 모든 절망과 분노를 녹여 작품에 정진한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의 소설을 읽어보면 계곡에서 쏟아내리는 폭포수를 조용히 잠재우며 편안히 먼 길 가는 섬진강의 강물 이야기 같은 잔잔함이 배어 있다.
이 같은 문학적 가치 때문에 선생이 말년에 터를 잡고 살았던 강원도 원주시와 태어났던 경남 통영시, 토지의 배경이 된 경남 하동군이 서로 업적을 기리는 문학관과 기념관을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선생은 한 여자로서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순간을 살아와서인지, 자신에게는 엄격한 윤리를 세워 올곧게 소박하게 사신 분으로도 유명하다.
말년에 원주에서 집필 활동을 하면서도 너무 편안하다고 자주 이야기했고, 그 편안함을 시로 표현하곤 했다. 봄이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고, 여름이면 저수지에 맹꽁이가 울어대는 원주의 텃밭에 엎드려 배추도 심고, 고추도 심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우리는 최참판댁 옆에 있는 초가지붕 선술집에 앉아 비 오는 남도의 풍광을 만끽하며 막걸리와 파전을 먹고, 박경리 선생과, 선생의 문학에 관하여 이야기하다가 늦은 저녁에 대구로 올라왔다. 한동안 선생이 나의 뇌리 속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아마도 평범했지만 비범하게 살다 간 한 여자로서의 일생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1999년 타계하여, 태어나고 자랐던 통영군 산양면의 포구가 보이는 야산에 묻혔다. 파도와 갈매기 소리를 벗 삼아 조용히 잠들어 계신다.
최규목<시인·gm3419@daeg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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