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와바시 애비뉴에 자리 잡고 있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SAIC)는 디자인 분야에서 미국 최고로 평가받는다. 최고를 꿈꾸는 젊은 디자이너와 예술가 건축가들이 이 SAIC로 몰려든다. 근데 이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가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어떤 부자 할머니 때문이다.
이 할머니는 가족이나 세상과 절연한 채 외롭게 살다가 끼고 살던 고양이에게 수백억 유산을 남겨주고 이 세상을 떠나는 일반 할머니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얼마 전에도 영국의 마리아 아순타 할머니는 유산 180억 원을 함께 살던 고양이 톰마시노에게 물려주고 죽었다)
SAIC의 인기 짱 할머니는 다르다. 죽을 때까지 매년 3억 원씩, 20~30년 정도 쓸 여유가 있는 이 할머니는 대학생들이 배낭 여행 계획서를 써오면 1인당 수백만 원을 그냥 지원해준다. 매년 100명가량에게 조건 없이 지원되는 이 프로그램은 SAIC의 자랑거리이자 대축제이다. 오늘도 SAIC 할머니는 세계 곳곳을 누비는 대학생들이 보내온 이메일과 엽서를 읽으며 행복한 노후를 보낸다. "마담 덕분에 저는 칭짱 열차를 타고 티베트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4,000m 고원 라싸에서 칭짱 열차를 타고 라마승을 만나고 온 젊은 여행객에게는 어떤 꿈이 자리 잡을까?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명지대 교수도 SAIC 할머니와 비슷한 부자의 행복한 소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유 교수는 지인이 보내오는 후원금을 문화유산답사 계획서를 잘 써오는 학생을 선발해 지원해준다. 젊을 때 견문을 넓히는 것은 창조 역량 개발과 직결된다.
IMF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국사회에 한 수 가르침을 주었던 매킨지 보고서가 15년 만에 북핵보다 한국 경제가 더 위험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처방전으로 중산층을 늘리고, 문화 예술 서비스 등 3차 산업을 활성화시키라는 주문을 내놓았다. 그런데 실제로 정부가 그렇게 하는지 잘 모르겠다.
로스앤젤레스 금융계 큰손 엘리 브로드,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폴 앨런, 반즈 앤드 노블의 창업자 레오나르도 리지오 등 재산 1억 달러 이상의 슈퍼리치들이 풍부해진 유동성으로 이달에만 해도 1조 6천억 원어치 그림 베팅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국내 유명작가의 작품을 국내로 들여오기만 해도 세무조사를 받는다. 얼마 전 크리스티 경매장에 박수근 김환기 작품을 10억, 12억 원에 사들여 온 사람이 미술계에서는 '애국자'로 불렸으나 세무조사를 받는다.
군소리 들을까 봐 부자가 호화 주택을 못 짓고, 재벌과 대기업은 국내를 택하지 않고 하와이나 가루이자와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에서 전략회의를 갖는다. 삼성그룹의 상무 이상이 참여한다고 알려진 전략회의 총인원은 적어도 1천 명은 넘을 텐데 이들이 구태여 하와이 등지에서 전략회의를 갖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이말 저말 듣기 싫은 기류가 작용한다. 그들이 편안하게 국내 호텔에서 전략회의를 갖도록 도와주면 일자리가 생기고, 돈이 국내에서 돌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부부 의사인 친구 언니는 지난해 2억 원 이상 세금을 내고도 1억 원여를 더 추징당한 후부터 백화점 출입을 끊고, 될 수 있으면 은행 거래를 덜한다. 돈은 개인 금고에 넣고, 은행 송금 대신 현금을 주고받으며, 백화점 VVIP(백화점마다 차이는 있으나 보통 연 4천만 원 이상 구매고객)에서도 이름을 뺐다. 요즘 5만 원권으로 15억 원이 들어가는 금고는 없어서 못 판다. 지하의 돈이 지상으로 올라오는 게 아니라 은행의 예금이 안방 금고로 들어간다. 그래서 지난 3월 한국은행이 밝힌 통화 승수는 16년 만에 최저일 정도로 돈이 돌지 않는 돈맥현상을 보이고 있다.
앞날이 불안해지자 덜 쓰고 덜 먹는 경향도 뚜렷하다. 웬만한 직장인들은 보통 주말에 2만~3만 원대 뷔페나 식당가에서 가족 식사를 했지만, 지금은 대폭 줄였다.
통계청이 24일 발표한 '2013년 1'4분기 가계동향'에서 1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비지출이 지난해 1'4분기보다 1.0% 줄어든 사실이 이를 대변한다. '소비 절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비자들이 미래가 불안해지자 미리 알아서 기는, 합리적인 기대가설의 현장이다.
지하 경제 양성화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정당하게 모은 부를 행복하게 소비하는 법을 가르치고 우리 사회에서 부자에 대한 편견을 고쳐나가는 노력이다. 가정마다 기업마다 은행마다 돈을 재 놓고도 '불황'을 불러와서야 되겠는가. 수출도 어려운 마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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