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통즉불통'(通卽不痛) -어울마당을 마치며

소통의 본질은 소통하는 대상, 즉 그게 사람이든 사회든 사물이든 동물이든, 있는 그 자체의 주체로 인정해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 불통이 만연하는 것은 주체여야 할 인간을 '객체화' 시켰기 때문이 아닐까요? 즉 소통의 주체로서 마땅히 존재해야 할 인간을 거꾸로 소통을 통해 태도 변화를 일으켜야 할 '대상'으로, 혹은 잘 꼬드겨서 특정한 목적을 이뤄내기 위한 '수단'으로, 아니면 내가 싸워서 이겨야 할 '경쟁자'로만 여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하승창의 '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능력이 세계 꼴찌일까?' 중에서)

그럴 때가 있다. 닫힌 문 앞에 서서 오래도록 서성거릴 때가. 내 마음 한편은 이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발은 땅에 붙어 꼼짝하지 않는다. 사실 내 마음과 발이 분리되기 전에는 그 문의 존재조차 몰랐다. 분리된 다음에는 그 빈틈을 외면할 수 있는 소박한 용기조차 나에게는 없다.

문 저편에 숨 쉬는 아름다운 진실들은 너무나 그리운 무엇이다. 열릴 것이라는 가능성의 믿음 때문에 아픈 건 사실 문 저편의 내 마음이다. 믿음만으로는 열기 어려운 견고한 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경계를 드나든다. 신기한 풍경이다. 여기와 저기는 분명 다를 텐데 그들의 왕래는 심각하게도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그러한 풍경을 소통이라고 불러주기에는 내 마음이 무겁다. 자연스럽게 왕래하면서도 나는 항상 '나'이고 너는 언제나 '너'다. 나는 '너'를 바꾸고 싶어하고 너는 '나'를 변화시켜려고 한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러니 언제나 껍데기만 만난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바로 그 껍데기다. 속살들이 만나 '통'(通)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언제나 '통'(痛)만이 내 안을 가득 채운다. '통즉불통'(通卽不痛)이라 했으나 '불통'(不通)하니 늘 '통'(痛)만 가득하다. '통'(通)은 '나'를 비우고 '너'를 내 안에 품는 과정인데 '너' 에게 '나'를 강요하는 걸음만 이루어지니 당연한 일이다. '통'(通)하지 못하면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프다.

모든 교육활동도 소통에서 시작되고 소통에서 끝난다. 그런데 '통'(通)하지 못하니 선생님도 학생도 지금 아프다. 소통은 정책이 지닌 철학이나 본질보다는 방법과 과정에서 나타난다. 교사가 학생을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나 특정한 목적을 이뤄내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교사와 교사, 그리고 학생과 학생이 싸워서 이겨야 할 '경쟁자'로만 여기는 한 절대 소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25일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가족사랑 토론 어울마당이 열렸다. 어울마당과 같은 교육행사가 끝나면 다양한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다. 좋은 행사였다는 격려의 말, 또는 고생 많이 했다는 위로의 말이 대부분이다. 사실 어울마당은 그렇게 단순한 표현으로는 단정할 수 없는 숨겨진 진실이 있다. 교육청도 소위 '관'(官)이다. 각 학교에 몇 명씩 배정하고 그렇게 차출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행사는 홈페이지를 통해 자율적으로 참가자를 받았다. 선착순으로 600여 명의 참가자를 선정해야 할 만큼 관심이 높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200명이 넘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행사 진행을 돕기 위해 자원봉사 신청을 했다. 600명의 토론 참가자에 봉사활동 신청자가 200명이라는 사실. 그 마음들이 만나서 이루어진 한 편의 거대한 드라마. 거기에 60여 명의 토론지원단 교사들이 약 한 달 간 행사 관련 워크숍과 함께 토론 참가자 및 봉사활동 신청자와 수평적인 소통을 했다. 그렇게 함께 어우러진 풍경이 어울마당이다. 이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울마당은 교육의 문화변동이자 문화창조라고.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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