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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루시앙 할머니의 정원

프랑스 음악 가운데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Qui A Tu Grand Maman)라는 곡이 있다. 별의별 기행으로 가득한 프랑스 예술계에서도 독특한 존재로 평가받는 '미쉘 폴나레프'가 1971년 발표한 이 곡은 1980년 광주를 노래한 '오월의 노래' 원곡이기도 하다.

평생을 가꾼 정원이 재개발로 사라지는 것을 거부하다 세상을 떠난 '루시앙 모리쎄' 할머니에 대한 추모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노래는 1960년대 서구 민중들이 획득한 대중의(혹은 공동체의) 자의식이 자본 논리에 의해 상실된다는 점을 노래하고 있어 각별하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에게 과연 집단의 대의가 중요한지 루시앙 할머니로 대변되는 개인의 인권이 우선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흑인과 여성의 민권을 주장하며 등장한 60년대의 시대정신은 베트남전 반대와 반핵 운동으로 확산되었고 미국의 플라워 무브먼트와 우드스톡 페스티벌, 프랑스의 68혁명, 일본의 전학련(全學連·젠가쿠렌) 등으로 상징되는 집단적 움직임을 가졌다. 이후 70년대는 개인의 성찰을 중시하는 미 디케이드(Me Decade) 시대를 열게 되는데 베트남전의 종전과 함께 성찰의 의미는 상실된다.

한국 사회는 이 시기의 정서를 경험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우리는 개발이라는 목표 하나에 매몰되어 한 방향으로 몰입해야만 했고 다른 생각은 인정되지 않았다. 겨우 90년대가 되어서야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권리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었지만 그조차 보편적인 정서를 획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재개발 현장에 걸려 있는 현수막 문구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천박함을 상징하는 듯해 씁쓸하다. '경축 재개발'이라고 쓰인 거대한 현수막 아래를 오가는 사람들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마천루가 될 거라는 기대에 들떠 있는 듯하다. 그곳에는 단 하나의 이야기도 추억도 없는 듯하다. 재개발 지역 어딘가에서 평생 정원을 가꾸고 있었을지도 모를 한국의 루시앙 할머니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정책이나 개인의 태도나 마찬가지다.

뭔가를 해야 한다면 해야 하겠지. 하지만 지난 가치를 묻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당장 추구해야 할 만큼 급한 일이 인간사에 있을까. 현수막이 담고 있는 의미는 정말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근사해지는 것을 자축하는 것일까. 아니면 추억을 담보로 재산가치가 늘어나는 것을 자축하는 것일까.

서구 대중음악가 몇몇이 그들이 치열하게 고민한 1960년대를 끝내면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노래에 담아 제시한 적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 두 곡의 음악이 던지는 의미는 새삼스럽다. 하나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이며 또 하나는 비틀즈의 '렛 잇 비'다.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2013년 대한민국이다.

권오성<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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