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은 아니지만 가끔 이용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이다. 손님을 대하는 지나친 친절이 아무래도 어색하다. 눈높이를 맞춘다고 꿇어앉아 주문을 받는 종업원의 응대가 그렇다. 과잉 친절에 말문이 막히고 주눅마저 들 정도이다. 이러한 훈련된 연출 분위기 때문에 음식에 하자가 있거나 종업원의 태도를 지적하면 금방 해결될 거라고 흔히 믿게 된다. 하지만 오산이다. 문제가 발생하는 순간 소위 그들 업계의 매뉴얼이 작동한다.
만약 종업원의 태도가 문제였다면 이렇다. 우선 극도로 겸손한 말과 표정으로 손님 요구에 응대하는 매니저가 등장한다. 이때 문제가 된 종업원은 뒤로 빠진다. 매니저는 손님은 왕이라는 '갑 의식'을 일깨워주고 자존심도 세워준다. 담당 종업원도 금방 새로 배치된다. 음식이 문제인 경우는 지체 없이 새 음식으로 교체해 주겠다고 나온다. 심지어 음식값 보상도 제안한다. 손님과 일대일 대면 사과의 매뉴얼은 여기까지이다.
그런데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든다. 음식에 잘못이 있으면 담당 요리사에게, 종업원의 태도가 문제였다면 그 종업원을 통해 직접 사과받고 싶은 맘 말이다. 식사 시간 내내 다른 섹션으로 배치받은 그 종업원이 눈에 밟히고, 얼굴도 모르는 요리사의 표정이 아른대니 무슨 밥맛이 나겠는가. 매니저가 그들을 대신해 사태를 수습하지만 마음이 쉬이 풀리지 않는 건 왜일까. 정작 사과해야 할 업계 대표를 만나 보았다는 사람이 없고, 시스템에 맡긴 형식적인 사태 수습만 해놨으니 '실패한 사과'의 전형이다.
근래 나라 안팎에서 이어진 릴레이 사과를 보면, 이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국민을 끊임없이 우롱한 게 아니냐는 비판에 동의하게 된다. 사과를 받고도 불편한 마음으로 눈치 보며 밥 먹는 식당처럼 이건 정말 한심하고 어이없는 일이다. 온라인에 등장한 패러디 사진과 이를 또다시 패러디해 비웃은 합성 사진을 보면 그들의 사과를 진정으로 받아들인 국민은 없어 보인다. 비행기 안에서 남양유업 우유를 옆에 두고 라면을 먹는 윤창중 패러디 사진은 그들의 사과를 조소하고 있는 극치이다. 라면 상무의 경우도, 청와대의 경우도 그랬다. 도대체 누구한테 사과하고 있는지 모호했다. 국민을 대상으로 했다는 사과가 내부용 '셀프 사과'라는 비아냥과 더불어 오히려 국민의 공분만 더했다. 대통령의 입 역할을 한 사람도 국민을 들먹이며 사과하다 실패했다.
당사자한테 하는 사과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일까. 포스코에너지도 남양유업도 최초 피해자인 승무원, 대리점주에 대한 사과가 없었고, 청와대의 첫 사과도 당사자 언급 없는 속 빈 강정이었다. 더 나쁜 건 가해 당사자는 일이 터지는 순간 증발하고, 책임 있는 사람은 얼굴도 볼 수 없으니 얼마나 황당한가. 가해 집단의 사과 매뉴얼이 짜깁기 되어 실행되기 전까지, 피해자는 식당의 잉여 고객 취급당하는 한심한 '진상 손님'일 뿐이다. 그들의 대응 매뉴얼에 피해자 보호 대책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고, 피해자는 그 시간 동안 고스란히 신상이 공개되는 이중의 고충도 겪어야 한다.
하물며 가해자 집단이 잘못된 사과로 곤욕을 치르면서도 좀처럼 후속 사과를 하지 않는 이유가 예사롭지 않다. 우리의 위안부 피해 사과 요구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고 '힘의 논리'를 앞세운 일본 아베 정권의 질주를 연상하게 된다. 닮을 걸 닮아야지 싶다. 그들이 내놓은 사과문이 그들만 알아듣는 언어였고, 그들 집단끼리 한 사과로 피해자에게 각인되어 있는 한 그 사과는 실패한 것이 된다. 사과를 받은 사람은 없고 사과를 한 측의 머리 숙이는 시늉만 떠오르니 답답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소나기를 피할 심산으로 이 핑계 저 핑계 댔다면 착각이다. 사과(謝過)에도 유통기한이란 게 있다. 식당에서는 식사가 끝나는 시간까지이다. 식사 시간 안에 앙금을 풀지 못하면 앞으로 그 식당을 이용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만 남는다. 타이밍을 놓친 사과는 2차 가해가 되어 상처를 더욱 깊게 할 뿐이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우리는 나라 안팎에서 벌어지는 2차, 3차 가해를 너무 많이 보고 있다.
이권희<문화산업전문기업(주)ATBT 대표 lgh@atbt.or.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이재명, '선거법 2심' 재판부에 또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