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동산기독병원과 대구 10월 사건

당시 시내병원들 경찰 치료 거부, 동산기독병원 만 부상 경찰 수용

총파업이 벌어지고 있던 1946년 10월 1일 대구의 모습. 낮시간 차분하게 진행되던 총파업 행사는 저녁 무렵 격해지면서 경찰과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매일신문 DB
총파업이 벌어지고 있던 1946년 10월 1일 대구의 모습. 낮시간 차분하게 진행되던 총파업 행사는 저녁 무렵 격해지면서 경찰과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매일신문 DB

'동산의료원 100년'에는 '10'1 좌익 폭동,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실천'이라는 제목으로 '대구 10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책이 출간된 1999년 10월만 해도 아직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보고서가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명칭을 '10'1 좌익 폭동'으로 표기했고, 내용상에도 폭동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책자에 소개된 내용을 정리해 본다.

'당시 경찰이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명의 시민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이에 성난 많은 시민들과 좌익들은 거센 폭도로 변하여 많은 파출소와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마구잡이로 죽이거나 구타했다. 부상당한 경찰들은 병원문 앞에서 성난 군중의 몽둥이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의사와 간호원에게도 한때 따돌림을 받았다. 대구의사회는 경찰이 시민에 대한 발포를 중지하지 않으면 부상 경찰들의 치료를 거부하겠다고 경고문을 발표했다. 실제로 공공연히 치료를 거부한 병원도 적지 않았다.'

10월 1일 오후부터 해질 무렵까지 대구 의료인들이 보인 몇 가지 부상 경찰관 홀대의 실례도 소개했다. 인용한 곳은 생략하고 간단한 내용만 정리해보면 이렇다. '어떤 부상 경찰관이 살려달라고 병원 계단을 올라가는데 폭도들이 그 사람을 끄집어내리려고 했다. 경찰관이 계단 모서리를 쥐고 안 내려오려고 하자 위에서 그 병원 의사가 떠밀었다.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경찰관의 머리를 폭도들이 돌을 번쩍 들어 내리쳤다. 머리는 박살 나고 흰 것이 튀어나왔다.' '가까스로 입원한 부상 경찰관들은 치료과정에서 따돌림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 입원 병실의 환자들에게서도 공공연한 도전을 받았다. 조금 전 거리의 공방전에서 부상당하고 입원한 일반 환자와 그 가족들은 한 병실에서 부상 경찰관들과 마주치자 다시금 욕설을 퍼부으며 폭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부상 경찰관들도 지지 않고 맞겨루어 환자들끼리 때아닌 육박전이 벌어지곤 했다.'

이런 와중에 제5대 동산기독병원장으로 추대된 문영복 원장은 "누구든지 부상당한 사람은 다 치료해주라"고 지시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미국 선교사들이 아직 한국에 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병원직들이 문영복 병리시험과장을 원장으로 추대했다. 앞서 지시 때문에 문 원장은 좌익들의 테러 대상이 됐다고 '동산의료원 100년사'는 적고 있다.

아울러 '대구시내 병원이나 의사들이 대부분 10'1 폭동의 위세에 눌려 부상 경찰관의 치료를 거부하는 마당에 동산기독병원이 부상 경찰관 치료를 해주도록 방침을 정한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용단이었다. (중략) 그러므로 대구의 10'1 폭동은 동산기독병원이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실천하느냐 못 하느냐의 시금석이 됐다고 할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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