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무명칼럼] 천인공노와 저러다 말겠지

정홍원 국무총리가 '천인공노'(天人共怒)라는 말을 했다. 하늘과 사람이 함께 노한다는 뜻의 이 말은 희대의 흉악 범죄가 일어났을 때나 북한 규탄 궐기대회에서나 들을 수 있던 단어다. 일상에서는, 특히 공직자들은 입에 쉬 올리지 않는 말이다. 순수한 국내 사건, 특히 경제적 문제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원자력발전소 부품 납품 비리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 것이다. 천'인'공'노. 이 네 글자는 이번 원전 비리와 관련된 사안이 얼마나 중차대한지를 방증하고 있다.

정 총리는 지난 31일 국가정책조정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원전의 안전과 직결된 주요 부품의 시험 성적을 위조해 납품한 것은 천인공노할 중대한 범죄"라고 밝혔다. 총리가 정부의 지침을 하달한 때문인지 정부에서는 엄중 처벌과 중징계가 논의되고 검찰은 발본색원(拔本塞源)을 이야기했다. 비리와 불법의 흔적이라도 있으면 뿌리를 뽑겠다는 것이다. 대통령까지 나서 밝힐 것은 국민들에게 소상하게 밝히고 조치할 것은 분명하게 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과연 사안이 중하기는 중한가 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총리가 공식석상에서 좀처럼 쓰지 않던 '험한' 말까지 써가며 분노를 표시하고 대통령까지 여기에 힘을 실어주는 형국이니.

수치상으로만 봐도 예삿일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23기에 이르는 우리나라 가동 원전 가운데 이 사건으로 가동이 정지되는 원전은 최대 10기에 이른다고 한다. 원전을 11기나 보유하고 있어, 원자력 클러스터 조성을 미래 발전 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경북에서도 절반에 가까운 5기가 정지된다. 원자력발전소는 가동 중이면 뉴스거리가 안 된다. 안전하니까. 그러나 가동이 멈추면 이유가 고장이든 정비든 뉴스가 된다. 그러니 온 나라 원전의 절반 가까이가 멈춰 서고 전체 발전 용량의 10%에 가까운 손실이 벌어졌으니 어찌 간단한 일이 될 수 있겠나? 나라가 발칵 뒤집어지지.

원전 가동이 정지되는 동안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의 손해액은 약 2조 5천억 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또 건설 중인 원전의 가동 연기에 따른 피해액과 여기에 산업 생산 감소액까지 합치면 그 수치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렇다면 이들을 관리'감독한답시고 무슨 위원회니, 무슨 협의회니 하며 모여 사진을 찍었던 '잘난 사람'들은 과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돈만 먹는 하마였나? 한국전력기술, 한수원, 원자력안전위원회 등 있으나 마나 한 관리'감독 기능은 한마디로 무용지물이었다. 한통속이나 다름없었다. 설계와 시공, 감리가 모두 한 곳에서 이뤄진다면 답은 뻔한 것과 같은 이치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 먹은 거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분노는 좀처럼 그칠 줄 모른다.

국민들은 전력 생산량 감소나 송전 제한 심지어 블랙아웃까지도 용납할 수 있다. IMF도 극복했는데 송전 제한쯤이야.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히 돈 몇 푼의 사안이 아니다. 티끌만큼이라도 잘못되는 날에는 수십만 수백만에 이르는 국민의 안위까지도 걱정해야 할 대재앙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다. 장난칠 게 따로 있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기억이 생생하지 않은가? 이번 원전 비리 관련자들은 원전 관련 초대형 참사들이 우리와는 상관없는 강 건너 불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혹시 원전 주변은 몰라도 나와 내 가족이 사는 서울은 괜찮다는 생각은 없었는지… 설마? 결코 안 될 말이다.

총리의 발언 강도로 봐서는, 이번 사건과 관련된 사람이나 기업은 원전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옳다. 개인은 아예 '쪽박'을 차게 만들고 회사는 문을 닫아 퇴출시켜야 한다. 천인공노에 걸맞은 응징이려면 그 정도는 돼야 한다. 그래도 국민들은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례에 비춰볼 때 여론이 잠잠해지면 이들은 다시 서울의 거리를 활보할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비싼 옷을 입고서. 그리고 사람들 기억에서도 원전 비리는 까맣게 지워질 것이다. '저러다 말겠지'라는 생각이 이들의 간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지금껏 언제나 소나기만 피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우리들 역시 속으로는 '저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 남양유업 사태에서도 윤창중 사건에서도 그 기질은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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